남자와 여자
작성자명 [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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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5.07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돕는 배필”이란 말에 있는 돕는 이란 말에 열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이란 말을 힘의 배분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돕는 배필이란 말에는 하나님과 동거하는 에덴동산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돕고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남자와 여자를 상호의존의 관계로 만드신거죠.
남자와 여자가 상호의존의 관계이기 때문에 돕고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는 돕는 역할을 여자에게 배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 이유를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분명한 것은
부부관계에서는 여자가 돕는 배필로서 사는 것이 조화로운 삶이라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습니다.
갈빗대를 취하여 만들었다는 말의 그 어디에도 힘의 역학관계가 내포되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아담이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기뻐하며 감격해 하는 것을 보면
갈빗대를 취하여 만들었다는 말은 열등과 우월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친밀의 관계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갈빗대에서 취했음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갈빗대로 만들어져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런 절대절명의 의존 관계와 친밀함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옵니다.
죄가 들어오니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관계로 변합니다.(창 3:16)
남녀의 역할과 지위에 힘의 역학관계가 작용하기 시작하였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아직 먹지 못하고 선악의 열매만 먹은 인간 남자는
다스림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 다스리게 되고 그것의 결과는 지배와 복종의 예속관계로 나타납니다.
남자의 갈빗대에서 취함이 남자로부터 취했으니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되고,
남자는 자기 이익에 따라 여자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돕는 역할과 갈빗대의 취함의 의미가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 이후로 “돕는” 역할과 갈빗대에서 취하여졌음이
처음과는 달리 여자로 하여금 철저한 남자의 노예적 예속물이
되게 하는 통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여자들은 추방이후 계속하여 깊은 좌절과 슬픔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거기다 더하여 여자는 남자를 “사모해야” 함이 죄의 결과로 더 하여집니다.
여자는 노예적 전락으로
날마다 울면서 돕는 역할을 하고 남자의 갈빗대에서 취해진 사실을 슬퍼하며
“노예들의 합창”을 한이 맺히게 부르면서도
남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인간에게는 선악을 아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여자도 예외가 아니죠 -- 그녀도 선악을 아는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선악의 힘을 사용하여 여자들은 자신들이 갇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갇힘이 돕는 역할과 갈빗대에서의 취함에서부터 나옴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갇힘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예속을 초래하는 돕는 역할 과 갈빗대에서 취해졌음 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도우는 자가 되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노력을
집단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목숨을 내걸며 해왔습니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여성들의 독립 선언은
돕는 역할과 갈빗대에서의 취함에 대한 여성들의 집단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남용한 남성들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여성들의 노예적 전락은 돕는 역할과 갈빗대 취함의 타락에서 비롯됩니다.
돕는 배필의 역할이나 갈빗대에서 취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라는 것이죠.
여성의 예속을 죄의 결과로 본다면 문제의 해결은 당연히 죄에서 풀려나는 것에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돕는 것과 갈빗대에서의 취해졌음 을 원래의 상태로 ,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셨던 개념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돕는 역할과 갈빗대 사건을 하나님의 개념으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들을 더 이상 힘의 역학관계에 놓고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돕는 일과 갈빗대에서 취해졌음이 의미하는 상호의존성과 깊은 친밀감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환원은 남자들에게서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스림이 남자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돕는 역할과 갈빗대 사건을 하나님께서 애초에 의도 하셨던대로 이해하거나 사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남자의 통회 -- 이것이 여자의 예속을 회복하며
종국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작이라 생각됩니다.
갈빗대에서 취해졌으며 돕는 배필의 역할이 여자의 열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분의 친밀한 관계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남자가 먼저 진정으로 인정해 주는 것에
회복의 시작이 있다고 보입니다.
죄를 보는 것은 여자에게도 해당됩니다.
돕는 역할과 갈빗대 사건이 남자들에 의해 전횡된 것이 남자들에게 들어온
죄로부터 생긴 일임을 알아주고, 그래서 여자의 예속을 푸는 것은 죄를 해결하는 것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적대하거나 그들을 떠나고자 했음을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죄와 사람을 분리하여 내지 못한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여자들 또한 내가 대접 받지 못한 것에만 통분하였을 뿐,
남자들의 죄의 무게는 미처 보지 못하였음을 애통해하는 것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쌍방이 죄를 보는 것--그것이 남녀 관계의 회복의 길인 셈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오늘날의 남녀관계의 문제를 죄의 결과로 보면 그리고
우리가 모두 죄에 매인 인생임을 알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적용 -- 자원하여 매이며
나를 죽이는 적용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 반응한 사람이 상대방의 구원을 위하여 자원하여 매이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상대방이 죄에서 풀려나는 것을 돕는 것, 그것이 또한 우리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적용이지요.
그러나 상대방의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위해 스스로 겸비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
그것은 죄사유함의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하는 적용일것입니다.
서로가 타락한 상태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떨어져 썩어져야 생명이 날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