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 속의 나
작성자명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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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4.14
고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거래선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이 자기 회사의 봉급날인데 우리 사무실의 미수금으로 인하여 봉급을 못 받게 됐단다.
물론 농담이지만 이 말 한마디에 짜증이 났다.
얼마 안 되는 돈이 미수로 남아 있고 또 그 회사의 광고 디자인을 해주었고 최근 팸플릿 디자인도 해주어 그 디자인비로 미수금을 일부 삭감하기도 했는데 후배는 만났을 때는 물론 전화해서도 미수금 얘기를 하며 “형네 사무실 돈 받으면 우리 경리부 봉급은 준다.”는 과장된 표현의 말을 몇 번이고 해왔다.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거북한데 별로 좋은 소리도 아닌 것을 여러 번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고 볼멘소리가 나갈 수밖에 없다.
결국 후배와 좋지 않은 소리를 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음 날까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지내다가 저녁에 지인의 사진전 오프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고난 주일, 조심스럽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오프닝 파티에 참석,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다음날 수요예배 갈 준비를 하다가 월요일의 사건이 시험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그런 사건이 아니었는가 생각하며 시험에 넘어간 나는 결국 예수님을 판 유다가 되어 버렸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하였다.
교회를 나오며 얼마나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에 대해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얼마나 주님과 같이 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정확히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 잡히시던 날,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오직 베드로만이 주의 뒤를 숨어 따르며 주가 어떻게 되시는가를 보고 있을 분이었다.
나라면 어찌 하였을까? 숨어서 따르는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른 베드로는 수난의 현장에 있지 아니하였다.
갈릴리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무리 중에 나를 발견할 수 있는가?
나의 모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 속에 있었다.
오늘 아침, 아주 오래된 일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전국 초등학교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을 그 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몇 달간을 훈련시키셨다.
선생님은 그 친구가 웅변에 훌륭한 소질이 있어 잘 다듬으면 훌륭하게 클 것이라 늘 칭찬하시고 우리를 청중으로 삼아 그를 연습시키시곤 했다.
선생님이 그를 아낌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질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회당일, 우리 반 전원은 그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다른 초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되는 웅변대회를 참관하게 되었다.
참가 연사가 차례대로 발표하고 드디어 그 친구의 차례가 되었는데, 대회 경험이 없는 그는 많은 청중 앞에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결국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고 연단을 내려오게 되었다.
교실로 돌아온 우리는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것도 못해, 말 한마디도 못하고 내려오냐? 창피하다. 뭐 이런 말들을 해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선생님이 들어 오셔서는 우리를 야단 치셨다.
“왜 그 아이 가지고 그래. 잘 했는데. 너희 들은 그만치 할 수나 있어?”
야유를 보내던 우리는 머쓱해서 조용해졌다.
지난날의 5학년 우리 반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적용해 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치는 군중들의 모습이 그 아이에게 야유를 보내던 우리 반의 모습과 같지 아니할까?
그 무리 속에 섞여 있었던 내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치는 자이다.
고난 주간을 지나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근신하지 못하고 시험에 넘어진 내가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못 박고 있다.
오늘 성금요일, 성찬에 참석하며 우선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는다.
주님, 이 죄 많고 어리석은 자를 용서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