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정죄감
작성자명 [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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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4.11
마 27:1~10
시어머니의 첫번째 기일이 돌아옵니다.
영접기도를 하시고,
돌아가시기 전날 세례를 받으셨기에,
그래도 그나마 며느리로써의 할일은 했다고 위로를 하지만...
저는 어머니 가신 후,
가끔 정죄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정죄감은 명절때나 집안 일로 가끔씩 부딪히는 시누이의 태도에서 느끼는데,
시누이가 저희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시누이 기준으로 제가 어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말 없는 항변과,
믿음이 틀린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며,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한 정죄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뿐 아니라 다른 일도,
회개보다는 정죄감에 자주 사로 잡힙니다.
베드로 같은 통곡의 회개는 나를 살리고,
유다의 정죄감은 나를 죽이는데도,
때론 정죄감을 갖는 것 자체가 믿음인 것 처럼 착각도 합니다.
오늘 유다도 정죄감에 잡힙니다.
그래서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고,
그 정죄감을 오픈하지 말아야 할 무리에게 가서 오픈하고,
그러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고,
다른 무리들은 피값이라며...밭을 사는 것으로 정죄감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잘났던 유다.
그래서 자신의 죄도, 자신의 정죄감도 스스로 해결하려던 유다.
자기가 자기의 복음이었던 유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던 유다.
그래서 유다의 결국이 이리 되었습니다.
많은 인생들이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유다는 자기의 정죄감을 자기가 해결하려다 이런 결국이 온겁니다.
유다를 그 정죄감에서 구원해 주는 것은,
원래대로 돌이키려고 돈을 돌려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당하라... 고 말하는 무리에게 그 정죄감을 오픈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자기 목숨의 주인이 되어 목숨을 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으로라도 보상하면 나아질것 같아,
피값이라며 밭을 사는 보상심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처럼,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통곡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많은, 똑똑한, 유다들이 정죄감에 잡혀 죽어갑니다.
내가 해결하려다 내가 죽어갑니다.
유다복음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마 또 다른 유다가,
자신들에게 있는 유다의 속성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그리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예 성경을 바꾸는 유다복음이 나오고 다빈치코드라는 어처구니 없는 영화가 나오는 것은,
매스컴을 이용한 기독교의 핍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 유형의,
유다의 횡포를 막기에 힘이 없는 저,
그래서 오늘은,
제게있는 유다의 속성을 놓고 통곡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