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라!
작성자명 [문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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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0.10.20
열왕기(상)18:30-46 묵상나눔
30.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제단 수축
갈멜산은 여호와의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파손 상태로 있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지파 수효를 따라 12돌을 취하여 무너져 있던 단을 쌓고,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만한 도랑을 만들고 나무를 벌여 송아지의 각을 떠 나무 위에 놓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말했다.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 넘치도록 여러번 그리하라고 말했다(31-35절).
엘리야는 왜 이렇게 했는가?
불로 내리셔서 물을 메마르게 하시는 이 일은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나,
인간의 교묘한 술수가 아님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와 우리 가정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신앙하는
삶을 위해 주께서 지금의 기근을 허락하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의 무너진 제단(하나님과의 관계)을 다시 수축해야 한다. 인간의 일이 판을 치는 이 땅의 교회에 다시금 바른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
엘리야의 기도제목
저녁 소제드릴 때는 오후 3시이다. 그 때까지 바알과 아세라는 난리법석을 떨며 공을 들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들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단지 목석으로 만든 우상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목석에 빌고 돌을 쌓고 치성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욕심의 투사이지만,
때때로 귀신이 와서 장난을 치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심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의 신은 묵묵부답이었다. 귀신도 불은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때가 되어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가 나섰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간구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
엘리야의 기도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구약 교회)의 하나님이신 것과 엘리야가 주의 종인 것과 그가 주의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뿐임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린다(36절).
엘리야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 낙타무릎으로 알려진 야고보는 그의 서신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약5:17,18)
그가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도했기 때문에 능력이 있었는가? 산 기도가 능력이 있는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일까? 물론 이 모든 것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응답의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무엇인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다(18:1). 기도는 반드시 말씀과 함께 한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가 되기 쉽다. 자기 중심으로 드리게 된다. 나는 어떤가?
기도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기도하다가 시간이나 재든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묵상과 기도를 병행한다.
말씀을 읽다가 멈추고 기도하며, 말씀을 다시 읽고 기도드린다. 마음이 든든하다. 지금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있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다가 받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드리고 있다. 오직 약속의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며.
또 하나!
엘리야는 그러한 기도제목과 함께 하나님을 떠났던 패역한 이스라엘이 주 여호왐나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고 돌이켜 그들의 마음을 전심으로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었다(37절).
나는 내가 기도하는 것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재 현상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 마음과 가족의 마음이 주께로 전심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사람들이나 환경이나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종을 부르신 주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 이 상황과 환경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을 잊지 말자!
마침내 불이 내렸다!
학자들은 번개라고 본다. 그러나 그냥 불이라고 보는 것도 괜찮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39절).
이 장면이 본문의 클라이맥스이다.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 이 신앙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엘리야를 부르셨고 사용하셨고 갈멜산에서 불을 보내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귀하고 용기있는 고백이다.
주님께서도 칭찬하셨다. 그러나 고백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이어서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는데 실패하였다. 신앙고백에 이어서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었던 디트리히 본 훼퍼는 그의 삶을 통하여 이것을 증명했던 인물이다. 그가 외치기를 복음이 값싼 은혜가 되어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 자기 부정이 따르지 않는 고백으로 끝나는 신앙은 결국 그 빛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어떤가?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며 주께 순종하고 있는가? 주님, 종으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게 붙들어 주옵소서. 나를 놓지 마옵소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다.
엘리야가 기손 시내로 그들을 데려다가 모조리 죽였다. 기손 시내에 피가 낭자하게 흘렀을 것이다. 사무엘도 이와 같았다. 사울이 죽이지 않은 아말렉 왕 아각을 단호히 처형했다(삼상15:32-33).
때때로 믿음은 인정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죄와 타협하지 않는 단호함이 요구된다. 결국 그들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다시 그들에게 끌리게 될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이 살 길이다(40절).
믿음에서 단호한가? 내가 단호하게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타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돌아본다. 어떤 일에 있어서 내가 드러나고 싶은 욕구는 평생에 싸워야 할 일이다. 이 영적 전투에서 지면 내가 죽는다. 오늘도 나의 옛 사람에 대해서 죽고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원한다.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지중해 서쪽에서 올라오는 손 바닥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 엘리야는 말씀과 함께 그릿 시냇가에서부터 사르밧 과부에게까지 지속적으로 믿음의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순종하여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승리하였다(41-46절).
믿음은 점차적으로 자란다. 갑자기 불 받았다고 생기는 것이기보다, 말씀과 함께 하는 순종의 삶가운데 나의 희미한 믿음이 자라는 것이다. 경험은 사라지고 말씀이 남아야 한다. 말씀만이 남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으로 간증을 하고 돌아다니며 삯군이 되기 쉽다. 조심해야 한다. 내 자랑은 결국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다(고전3:13-14).
작은 일에 민감하자! 손바닥만한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를 받기 원한다. 기도하며 주께 물어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한다. 그렇게 할 때, 마침내 큰 비의 소리(하나님의 능력)가 있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