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은혜를 못 받는 남자
작성자명 [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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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3.21
어제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같이 했었숩니다.
근데 거기서 나온 화제 중의 하나가 모 기독교 대학의 채플에 관한 이야기 였습니다.
어느 한 분이 자신의 자녀가 입학한 기도교 대학의 채플 시간에 목사님이 너희들 구원 받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간다 고 너무 자주 말해 아이가 짜증을 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학교가 너무 일방적이다고 꼬집었습니다. 그 분 교회 다니시는 분입니다.
천주교 신자이신 다른 한분이 맞장구를 칩니다. 그러기에 말이야, 그런 거 말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들려준다들찌 그럼 좋을텐데, 어찌 그런 시도는 안하는지 하고 대꾸했습니다.
다른 한 분이 내가 미국에 갔을 때 보니까 거기도 글쎄 가가호호 방문하며 구원만 받아야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머! 여기도 있네 했어요 하며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이며 도그마적인 사람들로 비판했습니다.
머리와 몸이 엄청 큰 사람들.
너무 철통같아서 무엇이 그 몸과 마음을 뚫을 수 있을까 싶었고,
그나마 고난 밖에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70-80년대에 많이 성장했는데, 이 시대의 성장의 동력이 삼박자 축복 으로 상징되는 기복 신앙적 성향에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기복신앙적 전통이 참 부끄러웠는데, 그건 이론일 뿐 실제 생활에서는 나도 복을 바라는 성향을 떨쳐버리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오감이 주는 만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건 불교의 스님들이 고행고행하며 벗어나고자 애쓰는 것이 오감의 세계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능력있는 하나님이 왜 자신의 어린 양을 내버려 두는지가 또한 설명이 안되었습니다.
기복신앙적 전통을 뚫고 나오는 데에는 고난만한 것이 없음을 체험을 통해 알았습니다. 고난의 의미가 해석되면서 고난의 영광을 알게 되었고, 수행이나 고행없이도 기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삶의 목표가 성공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 주고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져야하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 해야 하는 능력을 인간이 갖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싶었고, 실제로 그런 생활을 실천하는 신앙인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은 실현을 위해서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목표로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햇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를 알게되니 가능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오리 대신 십리, 겉옷 대신 속옷, 일곱번씩 일흔번이 어려워 보이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그렇게 하면 손해 본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손해보기 싫고, 당하기만해서 억울한 마음 누를 길이 없어서 할수 없는거죠. 이런 손해보기 싫어하는 인간의 이기심,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것도 고난의 의미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은 나와 상대방의 지경을 넓혀서 생명을 가져오는 것임을 깨닫고 확인하게되니 비로서 내가 죽는 고난 - 손해봄을 감수할 수 있게 되드라구요.
이런 것들을 깨닫게해주고, 눈으로 보게 해주고, 확인하게 해주었던 것이
우리들 교회 가르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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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께서 길게 쓰셨길레 자도 좀 길게 써보았는데,
쓰다보니, 좀 주제넘게 보이기도 하고 해서 마음에 안 드네요.
은혜를 못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은혜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 크신 것 같아요.
부디 분석만 하지 마시고
인간 존재의 어떠함이 가슴으로 깨달아지셔서
나눔의 말미에서 말하신 것처럼 이제 은혜 좀 그만 받으세요하는 농담을
하루속히 들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