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전히 은혜를 못 받았지요.
여전히 은혜를 못 받았지요!
어제 목사님과 나눈 인사다. 얼마 전부터 목사님과의 인사는 은혜를 받았느냐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지난 번에 목사님의 설교보다 QT를 하는 것이 내게 더 은혜가 된다 는 나눔을 올리면서부터 시작된 인사말이다. 그 이후로 몇 번 이런 인사가 이어졌고, 나도 솔직하게 말하곤 했다.
어제는 일대일양육교사 훈련의 QT과제를 돌려받지 못했다. 지난 주에 급하게 작성했기 때문에 이름을 빠뜨리고 제출했던 것 같다. 이름없이 제출된 페이퍼에서 내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적혀 있는 코멘트가 재미있다.
김강길집사님이세요?
아니시라면 죄송합니다.
아니시라면 김강길집사님을 찾으셔서 같이 대화해 보시고
서로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어떻게 내 것인 줄을 알았을까? 신기하기도 하지!
그 해답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결단과 적용의 란에 다른 사람의 나눔이나 목사님의 설교도 내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 라고 적은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뿔싸! 이런 곳에 은혜 안된다고 흔적을 남기다니! 결론은 은혜 안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라는 메세지가 되어버렸다.
간이 부은 사람같다. 모두들 은혜가 된다고 하는데... CTS에서도 은혜가 된다고 하여 4월부터 방송을 해 준다고 하는데.. 유독 김강길이란 사람이 은혜가 안된다고 하니...
여차하면 돌 맞을지도 모르겠다.(농담)
목사님 : 여전히 은혜가 안되지요?
김강길 : 은혜가 뭐지!
어제는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묵상 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은혜를 받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은혜의 여행을 시작했다.

첫번째 생각 : 은혜는 차이에서 나온다.
머리를 스쳐가는 것은 차이 라는 단어였다. 은혜의 정의를 아는 것이 가장 먼저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차이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은혜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는 부모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의 경우처럼 갚을 수 없는 그 무엇을 표현할 때에 쓴다. 세계적인 경영자인 잭 웰치는 직원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 주었다. 최고의 경영자가 보내준 편지를 읽은 직원들은 감동을 받았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다윗에게 자식처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신분이나 입장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가 크기에 은혜라는 단어를 쓰고, 부모와 자식의 사랑의 차이가 크기에 은혜라는 단어를 쓴다.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들교회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도 QT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내가 묵상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도 있기 때문이다. 내게 외적으로 보이는 큰 고난이 있고, 내가 해석하지 못해서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면 나도 은혜의 대열에 속해 있을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내게 신선함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들었을 때와 새로운 것을 깨닫았을 때에 마음이 움직인다. 설교를 듣는 것과 QT를 통해 묵상하는 것 중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은 QT쪽이 더 강하기 때문에, 설교보다는 스스로 QT를 하면서 은혜를 더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이 한편으로 나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보이는 큰 고난이 있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적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차이를 실감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번째 생각 : 루시퍼의 딜레마
두번째 생각은 루시퍼(사단)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루시퍼의 모습 속에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묵상의 대상이 되었다. 루시퍼는 천사장이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천사장이었다. 그가 반역을 했다. 하나님을 향해 받기를 들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보고 싶다. 하나님처럼 할 수 있다. 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천사의 신분과 하나님의 신분의 차이를 망각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청난 차이가 착깍으로 메꾸어져서 차이를 느끼는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현상이다. 차이가 없는 곳에서는 긍정적인 면에서는 감사가 나오고, 부정적인 면에서는 비판이 나온다. 그리고 그 선을 넘으려는 야망이 생긴다. 루시퍼의 영광은 루시퍼의 족쇄가 되어 버렸다. 루시퍼가 사단이 되어 아담과 하와에게 같은 생각을 심어 주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는 생각은 하나님과 인간 아담의 차이의 골을 메꾸어 버렸다. 은혜의 삶이 죄의 삶으로 바뀌는 현장이다. 압살롬은 다윗에게 반역을 했다. 다윗처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루시퍼는 결코 은혜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루시퍼의 영광에 취해있는 사람은 결코 은혜의 대열에 참여할 수 없다. 생각의 중심에 나도 할 수 있다 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면서 그의 생각도 함께 올라갔기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 것이다.
세번째 생각 : 높은 자는 은혜 받을 수 없는가?
높은 자란 신분이 높거나 힘이 있거나 자신의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은혜는 차이에서 나온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나의 낮아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보여지는 현실에서 보는 자신이 신분이 높고, 생각이 높고,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차이의 골을 메워버린다. 루시퍼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천사장의 자리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게 되는 것이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별 볼 일 없는사람임을 깨닫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부도를 맞아거나, 큰 병에 걸렸거나,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깨어지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환경이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낮아질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고, 은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아직도 난 나를 #44318;잖은 사람으로, 능력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에 차이의 골을 넓히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자, 부족함이 없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 된다. 스스로 차이를 만드어 내지 못하면 루시퍼 주식회사에 합류할 수 밖에 없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받아들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많고, 낮아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번째 생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그 무엇도 메꿀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높은 생각도 하나님의 자리와 하나님의 생각의 자리을 좁힐 수 없다. 차이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 높은 자리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 자체가 바로 은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헤를 받을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가 있다. 나도 그들중에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경우는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알 수 없다.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한다. 두번째는 자신의 생각이 꽉 차 있어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높은 자의 위치에 앉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경우는 아는 것과 체험한 것의 차이에서 오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알기는 하되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심장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앎은 있되, 눈물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지식은 있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 볼 때에 내가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교만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낮아짐의 자리에 내려가지 않음에 있다.그것이 새로움의 차이든, 신분의 차이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에 가슴 뛰는 감동이 없는 것이다.
마지막 생각 : 낮아짐의 원리를 배우라.
은혜는 차이에서 나온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차이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차이를 만들 것인가? 가 어떻게 은혜를 받을 것인가? 를 결정한다.
어떻게 차이를 만들 것인가? 라는 질문은 어떻게 낮아질 것인가? 의 질문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봐야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자신의 죄를 본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위치로 내려가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죄를 본다는 것도, QT를 통해 자신의 죄를 본다는 것도,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죄를 본다는 것도 다 같은 맥락으로 설명이 된다.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 은혜를 받는 길이다. 루시퍼라면 몰라도 인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낮아진 자신의 모습을 알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
두번째는 어떻게 차이를 만들 것인가? 는 어떻게 배울 것인가? 의 질문이 된다. 배운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배우는 것이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차이가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어린 아이에게도 배운다고 했다. 배우는 자는 겸손자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된다.
차이를 아는 것이 은혜를 아는 것이다. 차이의 순기능은 은혜와 겸손이고, 역기능은 교만이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는 은혜를 보장할 수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교만을 보장할 수 있다. 자기를 아는 자는 은혜를 알 수 있고,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를 알 수 있고, 감사를 아는 자는 찬양의 기쁨을 알 수 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주는 자의 몫이 아니라 받는 자의 몫이다. 은혜는 흐르게 되어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은혜를 받는 것은 계속 낮은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어제와 이 아침의 묵상의 결과다. 은헤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은혜는 쥐꼬리만치도 받을 수 없다. 은혜는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라고 준비하는 자에게 예비된 선물이기도 하다. 은혜를 묵상하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는 은혜를 받았어요 라는 말 대신에 은혜는 그만 좀 받으세요 라는 말을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