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9:31-39
31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 나와 함께 건너가자 ♱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함께 고난의 강을 건너가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의 강을 건너가려면 첫째,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헌신해야 합니다.
31절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라고 해요. 80세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는 큰 부자였어요. 그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맨발로 기드론 시냇가를 건너 마하나임에 머물 때 다윗 편에서 그를 공궤했지요. 그 바르실래가 다윗 왕을 배웅하고자 먼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는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왔고 다윗이 회복된 지금도 그를 지지합니다. 상황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끝도 그의 헌신은 한결같아요.
그런 바르실레에게 다윗이 뭐라고 제안하나요? 33절에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고 해요. 바르실래가 다윗을 공궤했을 당시 어떤 보상을 바라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다윗을 도왔다가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가운데 순전한 마음으로 드린 헌신이었으니까요. 다윗은 자신이 가장 낮아진 시절에 자신을 도운 바르실래의 은혜를 잊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에게 최고의 보상을 제안합니다. 이렇듯 주님은 내가 어떤 지분과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공기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 누군가에게나 공동체에 베풀어온 모습을 기억하십니다. 다윗이 바르실래를 기억한 것처럼 하나님도 신실하게 헌신한 자를 반드시 기억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 상황이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까?내가 행한 만큼 보상과 인정을 바라지는 않나요?
주님과 함께 고난의 강을 건너가려면 둘째, 나의 죄인됨과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 왕의 제안에 바르실래는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34절에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까’라고 해요.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정중히 거절합니다. 자기 생명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선악을 분간하기 어려우며 음식의 맛도 모르고 노랫소리도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요. 그런데 이것은 변명이 아니었어요.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노년의 자신에게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던 것이죠. 나이가 들어 미각도 둔해지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궁중에 들어가 보았자 왕에게 누만 끼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성숙의 기준이에요.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내가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곧 성숙한 자의 지혜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경험은 공감이며 그 공감을 가능케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할 때 현재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욕망의 멈춤이 가능해집니다. 바르실래가 그랬어요.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죽음을 정직하게 인식했기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르실레는 37절에서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라고 해요. 화려한 왕궁의 삶보다 자신이 살아온 자리,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곳에서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이 왕인 다윗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합당한 길임을 알았어요. 이처럼 자기 주제를 알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겉은 늙어갈지라도 별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 성공이나 노년의 안락함에 연연하기보다 나의 죄인됨을 보고 내 한계를 인정하며 인생을 거룩하게 마무리해 가는 것이 곧 성화의 길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 세상 성공이나 보상,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고 내 분수와 한계를 잘 지키고 있나요?
비교당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말씀으로 위로받고 살아나기를 소망한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가정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어요. 아들을 바라신 부모님은 또 딸이라며 실망하셨고 교회에서는 늘 언니와 비교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저는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없고 하나님도 나를 차별하신다고 오해했어요. 한 번은 초등학생 때 언니 때문에 예배에 늦었는데 전도사님은 제 팔을 꼬집으며 ‘너 때문에 늦었지 하셨어요?’ 예배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겠다 다짐하고 그 후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다가 성인이 되어 친구의 전도로 다시 교회에 돌아왔어요. 33절과 34절에서 바르실래는 예루살렘으로 함께 올라가지 않은 다윗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해요. 저 같으면 드디어 왕이 내 가치를 알아준다며 저를 무시하던 이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저를 아시는 하나님은 제가 결혼 후 난임의 고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저를 낮추셨어요. 얼마 전 4살 된 막내아들의 ‘엄마도 누구 엄마처럼 키 컸으면 좋겠다. 나도 키 크고 싶어.’라는 말에 열등감과 상처가 올라왔어요. 또 태권도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둘째 아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하는 형편에 눈물이 났지요. 하지만 지금의 환경에서 제 주제를 알고 자족하는 것이 세 자녀를 위한 것임을 알아요. 그리고 다윗이 바르실래 대신 그의 아들 김함을 잘 보살펴주겠다고 한 38절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붙잡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말씀으로 위로받고 살아나는 저와 자녀들이 되길 소망해요. 저의 적용은 ‘자기 곳으로 돌아간 바르실래처럼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를 잘 지키겠습니다. 세 아들에게 영양가 있는 간식을 만들어주고 아이들 숙제를 성의껏 도와주겠습니다.’입니다.”
37절에서 바르실레는 다윗 왕의 초청을 거절하면서도 한 가지 청을 올립니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라고 해요. 자신은 가지 않겠지만,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 김항을 데리고 가달라고 합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이 누릴 세상 영예는 거절했지만 자녀만큼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다윗왕의 통치가 있는 자리에 머물기를 원했어요. 그러자 다윗은 그의 청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38절에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내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고 해요. 부모가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고 욕심을 버리며 겸손이 물로 물러나는 뒷모습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유산입니다. 바르실래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심었던 헌신의 복이 고스란히 그의 아들에게 흘러 들어간 거예요. 39절에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고 해요. 다윗과 바르실래는 신뢰 속에서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화평의 관계를 맺었어요. 그랬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이별과 축복이 가능했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보다 더 완전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삶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삶까지도 그리스도께 의탁하며 그들이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아름답게 작별해야 할 때가 옵니다. 내 자리, 내 역할에서 물러서야 할 때가 와요. 그 순간에 바르실래처럼 할 수 있을까요? 억지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하여 아름답게 넘겨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인생의 마지막 헌신입니다.
♱ 기도 드립니다.
주님, 오늘 바르실래의 삶을 통해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상을 기대하면서 섬길 때가 많고 내가 행한 만큼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생색과 보상 심리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르실래처럼 상황이 어떠하든 한결같이 신실하게 섬기며 살아가길 원해요. 이 땅의 것들에 미혹되지 않고 나의 분수와 주제를 알아 주님께 드리고 이웃들에게 나눌 것만 있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행하며 물러설 줄 아는 성숙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힘과 쾌락을 쫓아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왕이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함께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