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8:19-27
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 소식을 전하는 자 ♱
하나님 아버지, 세상 성공의 소식이 아닌 십자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는 첫째, 사실보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오늘 19절에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말해요. 전쟁이 끝났으니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죠. 이 모습 자체는 참 귀합니다. 아히마아스에게는 열정이 있고 왕을 향한 충성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다윗의 마음입니다. 전쟁은 이겼으나 그 소식이 다윗에게는 마냥 기쁜 소식이 아니었어요. 반역은 끝났지만 아들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원수는 패했지만,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20절에 요압이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요압도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기에 부담이 있었겠죠. 그러나 적어도 지금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 단순한 승전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실만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사실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곳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도 상대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면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힘들어하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했어야지 말씀대로 하면 되잖아’하며 정답부터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 사람의 눈물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먼저 마음을 보는 거예요. 상대가 왜 힘든지 무엇이 아픈지 지금 어떤 마음인지 헤아리는 것에서 시작해요.
21절에 결국 요압은 구스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구스 사람은 이방 노예였기에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에 크게 얽혀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어려운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맡긴 거예요. 결국 이 본문은 소식을 얼마나 빨리 전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드릴게요.
♱ 나는 사실을 말하기에 급급합니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핍니까?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정답부터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식을 전하는 자는 둘째, 좋은 소식보다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22절에 보니 아히마아스는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라고 해요. 요압은 이미 이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도 아히마아스는 계속 간청합니다. 결국 23절에서 요압이 허락하자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달려가 구스 사람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참 열정적인 사람이에요. 좋은 소식이라 여기며 열심을 냈지만 그것이 다윗에게 구원의 소식은 아니었어요.
24절부터 보면 다윗은 두 문 사이에 앉아 소식을 기다립니다.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이 살아 있는지 돌아올 수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이었어요. 다윗은 압살롬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이 전쟁의 책임이 결국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압살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또 다윗은 요압의 성격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명령을 지켰을지 혹시 압살롬을 죽이지는 않았을지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27절에 파수꾼이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라고 말해요. 그러자 다윗은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하지요. 참 아름다운 평가예요.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신뢰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했고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우리는 보통 취업 소식, 승진 소식, 결혼 소식, 합격 소식을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감사한 소식이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좋은 소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 곧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는 실패 같고 손해 같고 눈물 나는 사건이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한다면 그것은 곧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는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일이라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며 사건을 구속사 관점으로 해석해서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계실까를 먼저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진짜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전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 나는 듣기 좋은 소식을 전합니까? 구원의 소식을 전합니까? 내 열심은 나를 드러내기 위함인가요? 사람을 살리기 위함인가요? 새로운 소식을 들을 때 말씀으로 먼저 해석하고 있습니까?
듣기 좋은 소식이 아닌 구원의 소식이 진정 좋은 소식임을 기억하며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소망한다는 한 청년의 청년 큐티인 묵상 간증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아히마아스처럼 좋은 소식을 먼저 전해서 상을 얻고자 한 저의 모습과 좋은 사람을 보며 좋은 소식을 기대한 마음이 제게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돼요.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처음 교제하게 된 전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며 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부탁드렸는데 감사하게도 허락을 받았죠. 저는 이를 좋은 소식이라 여기며 23절의 아히마아스처럼 달음질하여 그에게 이 소식을 전했어요. 그러나 이후 전 남자친구는 수차례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고 결국 부모님의 권면으로 헤어졌습니다. 이는 불신 결혼으로 나아가던 저를 막아주신 은혜의 사건이었어요. 또한 결혼 자체를 상급으로 여기며 분별없이 관계에 임한 제 모습과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구별하지 못한 저의 모습을 알게 되는 계기였죠. 최근에는 10여 년 전 알았던 집사님이 연락을 주셔서 소개팅을 제안하셨어요. 그분의 좋은 모습을 기억하는 저는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좋은 소식을 기대했지요. 그러나 미처 알지 못한 그 이면에 어려움을 겪고 관계가 지속되지 않으니 마음이 무거워지며 어느새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를 통해 제 안의 공평함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좋은 소식은 공평한 소식이 아니라 공평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 들려오는 구원의 소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제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십자가의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적용은 ‘억울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될 때마다 큐티 책을 펴고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입니다.”
오늘 간증한 청년처럼 우리는 종종 듣고 싶은 소식만 좋은 소식으로 여기고 힘든 사건은 나쁜 소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실패와 거절과 아픔을 통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히마아스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어 누구보다 빨리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소식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압살롬의 구원이었어요.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좋은 소식은 십자가 복음과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식의 기준을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 기도 드립니다.
주님,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어 누구보다 빨리 달려갔던 아히마아스의 모습 속에서 사람을 살리기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저희의 모습을 봅니다. 누군가의 아픔보다 내 열심을 앞세우고 공감하기보다 정답을 말하려 하며 상대의 마음보다 내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을 전하기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품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성공과 형통을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좋은 소식은 십자가 복음과 구원의 소식임을 잊지 않길 원합니다. 새로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먼저 큐티 책을 펴게 하시고 사건보다 말씀을 먼저 보게 하시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먼저 묻게 도와주시옵소서. 다윗처럼 한 영혼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주시고 압살롬의 구원을 바라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가족과 자녀와 공동체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저희가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내 열심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달려가는 저희가 되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