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9 성경묵상 순서 중 공관복음 - 주님의 십자가 COD(Cause of Death-사인) 묵상 중
요19:30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막15:43-44 :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빌라도에 요청 - 빌라도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요19:31-33 : 유대인들이 안식일 위해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달라하-(두 강도는 아직 살아있으니) 다리를 꺽고, 예수께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꺽지 아니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확인 사살)
눅23:28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들의 사인(COD)은 의학적으로 '질식사' 이다.
그래서 형을 빨리 끝내고 싶을 때 - 오래동안 검증되고 확실한 조치가 바로 무릎을 꺽는 것 ( 쇠, 나무 망치로 무릎 조인트 연골을 부셔버리는 것) - 짧은 호흡을 할 마지막 가능성마저 없애버리는 것 - 100% 숨을 못쉬어 사망.
● 십자가에 달려본 적은 없으나 숨이 쉴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죽음 직전의 질식사 사건이 있었다.
고향 앞바다에서 겨울 김농사 준비를 위한 가을시즌 바다 작업 하는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에 갑자기 무슨생각이 들었는지
내가 이 바다 바닥을 찍고 오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홀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빛은 옅어지고 어두워지고 고막을 압박하는 수압이 느껴졌다.
'아...더 가면 고막 터지겠구나 이제 올라가야지' 하고 방향을 틀어 수면을 바라보는 순간 0.1초만에 깨달았다.
'아...너무 들어왔구나 내 안에 남은 호흡이 부족하겠구나'...그때부터 엄습하는 것은 다른 어떤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죽는 것 보다 갈 때까지 가보다 죽자..라는 생각에 가장 처절한 손, 발짓으로 수면을 향해 몸부림을 쳤다.
점점 더 환해지는 것이 보여지니 조금만 더 가면 곧 수면밖으로 튀어 올라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바로 저기 앞에 빛이 굴절되어 어른거리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근데 아무리 올라가고 올라가도 수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느낌이었다.
'내 안의 호흡이 끝이 났다'...공포감이 극에 달하면서도 손발짓을 멈추지 않았다.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하니 짜디짠 바닷무리 코와 입으로 공기처럼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짧게 짧게 바닷물을 마시면서 손발짓을 계속했다. 한번에 길게 마셔버리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그 짧은 바닷물 들이마심으로 버티며 손발짓하는 것도 세네번이상 못한다.
'이렇게 죽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희한하게도 0.1초만에 당시 일요일 밤 10시에 방영하던 유명한 명화극장 시작할 때 나오는 영화필름이 지나가는 모습처럼 짧은 17년의 인생이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도 선명하게 쓱 지나가는 것이다.
'아...이게 죽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인가보다...그럼 진짜로 죽는 건가'라는 생각과 동시에 더 이상 바닷물을 마실수도 없는 극한의 상태에서 마지막 손발길질을 차고 정신을 잃을 찰나에 수면밖으로 머리가 나오게 되었다. 눈물 콧물 바닷물 다 토하며 동공에 핏줄이 터질듯한 통증으로 목선에서 뻗어버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은 고통의 수준을 넘어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는 것이 보이고 느껴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요 사건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 마지막 호흡이 멈추는 것마저 '쉼'이 되게 하는 구원의 능력을 위해 울다
도대체 이런 인간이 어떻게 내 아버지란 말인가 차라리 고아라면 이렇게까지 분노하며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늙어 밤새 안녕이라는 인사가 어색하지 않을 시기가 오게 되었다.
고향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니 가게 되었다. 평생 당하고만 살았던 조선시대 여인 뺨치는 여인상으로 살아오셨던 눈물나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어머니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아무리 때리고 죽일듯 폭력을 휘들러도 '아버지만 좋아하고 바라보며 살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하지? 바람났다고 소문이 난 아줌마가 안방에 아버지랑 있은데 도리어 부엌에서 따뜻한 밥상을 차려서 넣어주었으니...친척들이 난리가 났고 둘째 형은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것을 어머니가 말렸다. '넌 가만히 있어'라고 하면서...당시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도리어 분노가 폭발했었다. 그런 인간을 어머니는 평생 바라보셨다. 내게도 다르지 않았던 이런 인간인데 하나님은 약 30년간 성경을 1년 1독하면서 징그럽게 보았던 내게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 대목에서 내 눈을 여셨다.
부자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사로는 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내게 심각한 질문이 생겼다.
아무리 이런 인간, 이런 아부지 이지만...
'내가 천국에서 지옥에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으로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이 꼬라지를 날마다, 그것도 영원히 보아야 한다면...
과연 그곳이 내게 천국이 될 수 있는가? 내게도 지옥이 아닌가 말이다!'
이때는 아내와 강아지 새끼같은 두 아이들을 버려두고 사업으로 뭔가를 이룬답시고 홀로 캄보디아에 두개의 법인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나오고 잠이 안왔다. 이런 인간에게 내가 왜이러지?
그렇지...죽이든 살리든 지지고 볶든 과거이고...내가 거룩하고 영성이 깊어서가 아니라,
내가 천국에서마저 지옥같은 삶을 살면 안되니까...이 사람이 지옥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시간이 얼마없구나!
만약에 이 양반 생명이 여기서 끝나버리면 남은 인생 어떻게 살든, 이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죽음의 짐을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눈물만 나왔다. 인터넷 전화로 시골 목사님께도 구원상담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귀국해서도 계속했다.
기도 따라하는 것이 구원이 아님을 알기에, 아버지가 코에 산소호스를 끼우는 지경이 되고 교회에 나가더라도 엉뚱한 이야기만 하는 것을 보면 더욱 애가 탔다. 그러나 결국, 소천하시기전 몇달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음을 알 수 있는 고백을 통해 평생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구원의 짐을 내려놓게 되니 회오리바람 속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 쉼으로 가는 마지막 호흡 vs 영원한 상실의 눈물로 끝나는 마지막 호흡
살아가다 어렵고 힘든 수준을 넘어 숨이 쉬어지지 않는 형편까지 가면 위험하다. 너무너무 고통스럽다.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모습들 속에서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놀라운 깨달음을 주시었다.
호흡이 목에가지 차올라서 숨 한번 쉬는 것이 본인에게나 옆에 있는 가족에게나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몇몇 가족에게 이런 말조차 나왔다. '아부지 이제 볼 사람 다 보셨고 고생하셨소, 이제 고통스런 숨을 놓으시고 쉬세요'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마치 너무너무 무거운 어깨 짐을 내려놓을 때 나오는 홀가분하고 쉼이 느껴지는 호흡이 길게 내쉬어지며 고통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고단한 88년의 삶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바로 직후 두가지 모습이 벌어졌다.
(1) 구원이 없는 가족 : 세상 무너진 것 같은 눈물의 통곡이 터졌다.
(2) 부활 소망 소유한 가족 :
① (소천하신 아버지 앞에 두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잠시 떨어지는 석별의 정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입에서는 다시 만날 '천국의 소망'과 남은 세월 살아가야할 '이 땅에서의 소망'이 터져 나왔다.
② 마지막 숨을 길게 내 쉬는 그 장면이 내게는 88년 동안 불어넣어 주셨던 호흡을 '이제는 쉬라하시면서 거두어가시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호흡이 내게는 '영원한 안식, 진짜 쉼'으로 들어가는 평안의 호흡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원 못 받으면 어쩌나...하며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많이 뿌렸기에 영원한 생명과 안식으로 들어가는 마당에 내게 울일은 없었다. 마지막 끊어지는 호흡마저 '평안한 안식과 쉼'으로 바꾸는 구원의 능력이 보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망한 인생, 할 것도 별것 없으니 남은 인생 - 눈에 보여주시고 붙여주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면서 셀 수 없는 죄의 대가를 치러야 겠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영성일기 쓰면서 기록하며 돌아보고 있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무려 286여만명을 총알도 아까워 땅에 묻어버린 놈이 평생에 해봐야 얼마나 할지 모느라 내 마지막 호흡이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갈데까지 가봐야 겠다.
나한테 잘못한게 많았는지 서울에서 남도 끝자락까지 가는 동안 보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그 호흡을 무려 8시간 버티고 계셨다는 것을 60년 넘게 아버님을 모셨던 둘째 형님이 '너 볼라고 저렇게 버티고 있다' 말하면서 알게 되었다.
비록 아버지 귀에 대고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뭐라고 말좀 해주고 가셔야지요 나한테!'라고 속삭였지만 끝내 답변을 듣지 못한 아쉬움에 더욱 천국이 그리워진다.
◐ 모든 사건 뒤로하고 가장먼저 할 일 - 목숨 붙어있을 때 위하여 울자!
- 죽어버린 후 영원히 지옥에서 울고불고할 자신이 있으면 니 소견대로 살고.
◐ 이제는 내게 고난주간, 부활절이 따로 없다. 쉼없이 밀려오는 파도같은 일상의 사건과 사람들을 온몸으로 부딪힐 때, 내 성질과 혈기로는 안되는 것을 알기에 그 매일의 일상이 바로 부활의 생명력을 바라보며 나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적용으로] (1) 아내를 향하여 : 어제까지 다툼이 있었다. 돌아켜보니 눈물만 나온다. 속아서 시집왔고 믿음하나 보고 시집왔다는데 내가 보여준 모습은 혈기 대마왕이요 지금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거늘!!'이 내 입에서 나오고 있는 꼬라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아내를 향한 긍휼이 눈물로 나온다. 이제 귀하게 보이고 귀엽게 보이고 연약한 그릇으로 보이기에 말부터 달라지게 되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향 수면아래서 마지막 발길질을 해서 살아난 것처럼 이것으로 끝나더라도 긍휼로 결론나는 언어로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2) 회사에서 : 상황, 인력구성이 참 어지럽다 : 처음으로 말씀 적용으로 오게된 이 회사 - 이유를 모르지만 그간의 분기탱천의 언어와 몸짓 - 적어도 뒷모습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분노대신 출근할 때 입구에서 손을 들어 이 회사를 축복하고 어린 구성원들에게 어지러운 말은 끊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긍휼의 태도와 언어'로 하나씩 바꾸어 가리라
(3) 아들에게 : 아버지와 나와의 사건을 - 아들에게 투영하지 않기로 했으니 - 정말 이해 안되고 용납이 되지 않아도 - 아들의 생명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분명히 '내 아들이어야 했을 섭리'를 인정하고 긍휼의 언어로 바꿔 내리라.
(4) 더욱 울게 하소서 : 시기와 분노로 쏟았던 눈물들이 영혼 위한 눈물의 기도로 변하기를 소원하며 남은 세월 보내기를 3년전부터 해왔으나 뛰엄뛰엄 되었던 이 척박한 마음 밭에 긍휼의 비가 홍수처럼 내리게 하소서.
노아 때는 다 죽여버리는 홍수였지만 내게는 마음속에서 죽여버린 사람들만큼 살려내는 눈물의 기도가 홍수처럼 임하게 하소서.
어차피 눈물없이 살아지지 않는 인생이오니 가장 복된 가치 위해 울게 하소서. 아직 살아 숨쉬고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