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6-11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
하나님 아버지, 내가 아끼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도록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려면 첫째,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라고 해요.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께 성내고 초막에 틀어박힌 요나를 직접 찾아오셔서 박넝쿨을 시각 자료로 사용하여 다시 양육하십니다. 요나는 자기 열심으로 초막을 지었지만 초막은 뜨거운 바람을 막지도 요나를 보호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비하신 박넝쿨은 하루 만에 자라서 요나의 머리를 가리는 그늘이 되어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 12만 명이 회개해도 전혀 기뻐하지 않던 요나가 이 박넝쿨에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크게 기뻐하였더라고 하지요. 이것이 요나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요나는 구원 때문이 아니라 환경 때문에 기뻐하는 거예요. 말씀에는 무감각한데 자기에게 좋은 일에는 즉각 반응하네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돈이 생기면 기쁘고 계획이 틀어지면 화가 납니다. 작은 도움 하나에도 기뻐하는데 누군가의 회개와 구원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것이 요나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입니다.
7절에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라고 해요. 요나가 그렇게 기뻐하던 그늘이 하룻밤 사이에 벌레 때문에 없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예비하사’예요. 박넝쿨도 하나님이 예비하셨고 벌레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거예요. 위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위로를 거두어 가시는 훈련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너무 꼭 붙잡고서 기쁨으로 삼으며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벌레 하나로도 없애실 수 있어요. 벌레 하나로 요나의 기쁨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우리 역시 작은 사건 하나, 작은 문제 하나에도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반응할 때가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에게 닥친 고난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건도 벌레 하나 수준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 박넝쿨을 없애버리셨을까요? 요나가 하나님보다 박넝쿨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요나의 관심은 한 영혼이 아니라 자기 머리 위 그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해서 요나가 아끼는 것을 깨뜨리고 드러내신 것은 요나가 무엇을 진짜 우상으로 삼고 있는지를 좀 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이었어요. 적용 질문 드릴게요.
♱ 요즘 무엇 때문에 심히 기뻐합니까? 최근 내 삶에서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신 사건은 무엇인가요? 주께서 예비하신 박넝쿨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반응했나요?
생명을 귀하게 여기려면 둘째,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야 합니다.
6절에서는 박넝쿨을, 7절에서는 벌레를, 그리고 8절에서는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다고 해요. 하나님은 환경을 너무 좋아하는 요나를 위해 계속해서 환경을 통해 양육하십니다. 이 뜨거운 동풍은 육체적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어요. 머리가 쪼이는 고통 속에서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또다시 죽기를 구합니다. 앞서 3절에서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지금도 똑같이 말하지요. 요나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고 분노한 까닭입니다. 그는 여전히 상황과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어요. 박넝쿨이 없어졌다고 성내고, 동풍이 불었다고 죽기를 구해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에는 무감각하면서 자기 상황에는 과하게 반응합니다. 결국 영혼 구원보다 자기 안위에만 예민했던 것이지요.
9절에서 하나님이 다시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하고 질문하세요. 그런데 요나는 그 질문에 ‘옳습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 정도로 옳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황당한 고집이에요. 아주 강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의 고집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질문으로 양육하시네요. 요나는 자기 감정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끝까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요. 감정적인 고집과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 법이죠. 여러분은 어떠세요?
♱ 요즘 무엇 때문에 화가 납니까? 그 분노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분노인가요? 아니면 내 기준에서 나온 감정적인 폭발인가요? 지금 나를 뜨겁게 하는 동풍은 무엇입니까?
집안의 장녀 역할을 감당하던 자신의 의로움과 교만을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고백하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를 낳은 후 어머니는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셨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과 장녀의 역할까지 감당했어요. 그러나 부모님은 여동생을 사랑하셨지요. 그러다 동생이 결혼 후 갑상샘 항진증으로 6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저희 집에 한 달간 머물렀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동생의 회복을 돕기로 했지만 제 의로움이 올라와 동생을 향한 걱정의 말이 과해지고 동생에게 오히려 근심과 불안을 안겨주었어요. 결국 동생은 제게 쌓인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믿음의 공동체 덕분에 올라오는 혈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저는 또다시 하나님께 ‘더는 못하겠어요’하며 짜증과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어요. 그때 하나님은 저를 교회에서 양육 훈련을 받도록 이끄시고 9절 말씀처럼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하며 저의 옳음에 대해 집요하게 물으셨어요. 그러다 저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 깊은 회개 가운데 ‘하나님이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지요. 제 안에 뿌리내린 교만을 보라고 제 옆의 가족과 지체들이 수고하고 있음도 깨달아졌어요. 이제는 구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기도하길 원해요. 때마다 저를 설득하여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려요. 저의 적용은 ‘부드러운 말투와 표정이 나오도록 수시로 연습하겠습니다. 공동체에서 자랑 섞인 이야기보다 저의 부족한 모습을 나누겠습니다.’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생겼다가 사라질 수 있는 그늘 하나 때문에 성을 내고, 정작 회개한 수많은 영혼을 보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요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세요. 이는 단지 니느웨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불순종하고 삐치고 자기 의에 가득한 요나조차 끝까지 아끼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심으로 아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기준과 감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영혼을 바라보며 공동체를 품는 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끼시듯이 이제는 우리도 누군가를 아낄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 기도 드립니다.
주님, 오늘도 박넝쿨 하나에 기뻐하고 벌레 하나에 무너지고 뜨거운 동풍 앞에서 죽고 싶다를 외치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정말 아껴야 할 것은 내 머리 위 그늘이 아니라 주님이 아끼시는 한 영혼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사라질 것들에 마음을 쏟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내며 삐지고 초막 속에 틀어박혀 있는 요나 같은 모습이 저마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부드럽게 물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분노가 옳다고 우기는 교만을 꺾어주시고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예비하신 박넝쿨도 벌레도 동풍도 우리 안의 우상을 드러내시려는 사랑의 손길임을 인정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환경이 아닌 말씀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부어주셔서 우리도 누군가의 생명을 위해 울어주고 사람을 살리는 자리로 걸어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나를 끝까지 아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품고 섬길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