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4-15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 간절한 마음으로 ♱
하나님 아버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면 첫째, 딱풀 성도가 생깁니다.
바울이 관례를 지켜 데살로니가 회당에 들어가서 3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어요. 이 강론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집니다. 4절에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라고 해요. 회당은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였지요. 그래서 거의 유대인들만 모였어요. 물론 개종하고 온 경건한 헬라인들도 있었지만 유대인보다 많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4절에 보니 바울이 전하는 성경 강론을 듣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헬라인과 귀부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권함을 받고 따랐다고 해요. 여기서 ‘따르다’라는 단어는 ‘제비를 뽑아서 몫을 전해주다’ 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바울과 실라의 몫으로 딱 할당해 주셨다는 뜻이에요. 핍박받아서 떠난 바울과 실라에게 이렇게 딱풀 같은 성도가 생겼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는 강론이 올바르니 성도들이 따르는 것이죠.
구속사적 강론으로 권함을 받고 가치관이 변하면 행복이 아닌 거룩을 추구하며 살게 되고 이기려는 삶에서 회개하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딱풀처럼 딱 붙어서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기꺼이 집니다. 승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함께 나누는 것이지요. 똑같은 귀부인이라도 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력자들과 경건한 귀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선동되어서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냈어요. 기억나시죠? 그런데 오늘 귀부인들은 다릅니다. 분명 호강만 하던 겉모습이 귀부인들이었을 텐데 이 자유로운 도시에서 왜 그렇게 복음을 따랐을까 생각해보면 남편의 타락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고 외로웠을 것 같아요. 그런 고난이 있으니 데살로니가 귀부인들이 바울 복음을 듣고 딱 달라붙은 것이죠. 그래서 고난은 말씀 편에 서게 하는 힘이고 축복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 우리는 말씀을 따르게 되고 믿음의 공동체에 붙어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이 악하고 음란한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 어디에 딱 달라붙어 있나요? 내가 따르는 사람, 공동체,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통해 말씀 편에 서 있나요? 오히려 말씀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면 둘째, 시기하여 소동하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5절에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라고 해요. 이후에 6절, 7절, 8절을 함께 봐도 이 불량배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자꾸 핍박합니다. 5절에 ‘시기하여’라고 번역된 단어는 ‘항쟁하다, 겨루다, 열광적이다’라는 의미가 있어요. 유대인들이 단지 시기심만 표출한 것이 아니라 광적으로 흥분하여 바울 일행에게 대항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죠. 시기, 질투, 경쟁심 등의 뿌리는 똑같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욕심 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동료가 인정받을 때 더 많이 질투합니다.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아주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어요. 저자의 불량배들을 매수해서 시민들을 선동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반역자들이 왔다면서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한 야손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며 바울을 잡으려고 해요. 바울을 놓치자 야손과 그 집에 있던 성도들을 대신 잡아서 황제의 명을 거역한 자라며 반역자로 몰아세웁니다. 시기심에는 이렇게 소동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말씀이 없으니 그 악에 한계가 없어요. 그들은 바울이 간절히 전하는 말씀을 듣지 않아요. 교회가 가이사를 거역한다고 비난하는데 정작 자기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안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건이 생기면 실상 안 믿는 자처럼 소동을 일으키진 않나요? 내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늘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시기할 수 있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암에 걸려?’ 이런 게 바로 행위 구원입니다. 기도만 하면 다 합격하고 다 낫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죄를 모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프고 떨어지면 딱 건강하고 합격한 사람이 저절로 시기가 되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영혼 구원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한 가정의 한 사람이 중요함을 알고 공동체의 그 한 사람 때문에 애통의 눈물을 흘리며 가는 것이 필요해요. 그러면 다른 것은 저절로 되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 곁에서 유대인같이 소동케 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말씀을 더욱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내 곁에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나요? 내 안에 일어나는 소동 가운데서 나의 시기심이 보이나요? 소동케 하는 사람과 사건을 통해 간절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나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자기 모습을 보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책임지길 원한다는 한 청년의 청년 큐티인 묵상간증이에요.
“저는 혈기 많으신 아버지와 율법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착한 아이로 자랐어요. 차가운 분위기의 가정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건강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한 번씩 이상한 부분에서 혈기를 터트렸지요. 그러나 한 사건을 통해 ‘전도서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었어요. 대학교 행정직 계약이 끝나가기 몇 달 전, 한 부서에서 동일한 내용으로 민원이 들어와 팀장님에게 여쭤본 뒤 지시받은 대로 응대했어요. 그런데 얼마 뒤 동일한 문제로 한 교수님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게 되었어요. 팀장님은 놀라서 제 자리로 와 저를 진정시키셨고 이내 정신이 든 저는 제가 벌인 일이 가져올 후폭풍이 두려워 퇴근하며 동료들에게 죄송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계속 자책감이 들고 눈치가 보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펼쳤어요. 그동안 저는 제 안에 혈기와 생색을 솔직히 드러냈다가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 봐 두려워 갈등을 마주하기보다는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또한 그런 제 모습이 지질해 보여 말씀으로 해석한 척을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닌 회피였다는 것을 깨달아요. 이제는 11절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감정을 부정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기를 원해요. 그리고 건강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저의 자리에 머물러 결과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의 적용은 ‘멋지지 않더라도 솔직한 묵상을 주 1회 교회 소그룹 대화방에 올리겠습니다. 민원 전화를 응대하기 전 짧게라도 기도하겠습니다.’입니다.”
11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해요.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너그러워서 말씀을 상고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성경을 상고했기에 너그럽다’는 말입니다. ‘상고하다’는 ‘판결하다’라는 뜻인데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꼼꼼하게 비추어 보고 판단한다는 거예요. 즉 분별을 말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니 베뢰아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해요. 소동하는 내 안의 시기심을 바라보며 이것을 말씀에 비추어 상고할 때 내 가정과 직장, 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 줄로 믿습니다.
♱ 기도합니다.
주님, 말씀을 모르니 세상이 좋아 세상에 딱 달라붙어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바울의 강론으로 이제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딱 달라붙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딱 붙어가는 딱풀 성도가 되도록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붙어 있으면 다 잘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소동이 있다고 하시니 이 큰 소동 가운데서 우리의 시기심과 미움, 그리고 욕심을 보게 도와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내 모습을 비추어 날마다 말씀을 상고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