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야 연대기"
작성자명 [서선희]
댓글 0
날짜 2006.01.20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닌데 이번 주 초에 “나니야 연대기”라는
영화를 또 한편 본 것은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남자‘를 보고 난 후 마음이 쓸쓸하여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믿음의 작가, C. S. Lewis가 원작자이면
그 영화에는 예수님으로 인해 화면 가득히 노란 꽃이 피고 있을지 몰라,
연한 새싹이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을지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파스텔의 부드러운 텃치처럼 부드럽고 희망이 보이는
예수님의 위로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영화관에 갔습니다.
영화는 광대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렸다는 화면은 곳곳에서 크고도 웅대했고,
사실감을 주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기술력도 뛰어나 보였습니다.
얼음나라의 모습을 보며 사망의 나라가 저렇겠구나, 그런데도 나는
거기에서 못 떠난다고 아우성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사망과 생명의 나라의 완연한 대비도 보았고,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녹아내리는 강을 타고 건너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함도 확인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영화는 메시지는 확실했습니다.
동성애 따위가 우리 인생을 건질 것이라고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자,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손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지루했습니다.
“왕의 남자”가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없었습니다.
“왕의 남자”에는 우리의 ‘인생’이 있습니다.
각 색 병에 걸려, 어떻게 고통스러워 하는지,
길이 아닌 길을 가며 얼마나 힘들어하는지가 선명합니다.
그런데 “나니야 연대기”에는 길(道)만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은 전에도 여러 번 보았고 그래서 제게는
“나니야 연대기”가 도(道)를 전하는데 있어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시된 길은 사자나 반인반수 등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소개된 다른 영화나 문학,
예를 들면 “반지의 제왕”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파랑새”들하고
별로 차별이 없어 보입니다.
사망의 나라는 보여주었지만, 죄 아래서 사망의 종노릇하는 인간의 모습이
“왕의 남자”에서처럼 (장생과 공길의 관계로 나타나는) 보여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 주위의 사람들이 그 영화 어떠냐고 물으면
“별로야” 하거나 아니면 “얘들용 이지 뭐”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각 색 병에 걸리는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왕의 남자”가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장생과 공길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외줄을 타며 신명으로 하늘을 치솟는 것으로 해결되고 있지만,
그들이 아무리 치솟아도 곧 쳐들어오는 연산군 타격대에 의해 망하고야 말것이라는
암시를 남기는 영화의 끝 장면은
동성애가 곧 해결의 열쇠가 아님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왕의 남자”가 한 수 위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보고 제 마음이 슬펐던 이유는 엄격히 말하자면
영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영화를 읽어내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시각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자신들도 모른 채 동성애를 수용하고 있는,
그래서 동성애를 아프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그런 분위기가 슬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 코드가 슬펐던 거죠.
기독교의 문화 코드가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월트 디즈니 식의 방법은 이제 좀 식상하지 않나 싶습니다.
스케일의 웅대함과 기술력에 의존하여
이것이 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젠 단순하고 진부해 보입니다.
(길만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죄 아래 있는 우리 인생의 모습이 “왕의 남자” 식으로 풀어지는
- 우리들 교회가 죄를 자복하는 모습에서 보여지는 - 방법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좌우지간 “나니야 연대기‘에는 길은 있었지만
가슴이 녹아내리는 감동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것은 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 때문으로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