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29.토요일. 누가복음 19장 28-44절 평화의 왕
주님 말씀하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를 strong man시대라고 합니다. 마초적인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고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는 동맹국의 주권도 침해하고 타국의 영토와 자원과 국가기간시설(원자력발전소, 운하 등)을 강탈하고, 정치적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의 사지로 내몹니다. strong man의 권력욕과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도구화되고 희생당하는 셈이죠. 그러나 진정한 Strong Man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 어떻게 다른 왕이십니까? 첫째,
나귀 새끼를 타신 주님
예수님께서는 므나의 비유를 말씀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뜬금 없은 지시에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제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천리안이라고 가지신 걸까? 아직 가보지도 않은 맞은 편 마을에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잖아? 남의 나귀새끼를 허락없이 풀어 끌고 오는 것은 도둑질아닌가? 혹시 주인에게 잡혀 절도범으로 몰리는 것 아니야?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혹과 의심과 염려를 단칼에 날려버리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나귀 새끼에게도 나귀 어미에게도 나귀 주인에게도 주인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신 생명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주권을 주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창조 목적대로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모든 생명체나 무생명체도 다 쓰임새를 따라 생명을 부여받고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視界(시계)에게 벗어나 있는 피조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귀새끼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구속사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맞은 편 마을 한 집 문 앞 기둥에 매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주님께서 구속사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쓰시고자 할 때,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나귀 새끼의 명목상 소유주도 실 소유주이신 주님의 명령을 거스릴 수 없고 나귀 새끼를 쓰시겠다는 주님께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왕의 예루살렘 성 입성행사에 쓰시는 의전 짐승이 하필이면 나귀새끼일까요? 세상 strong man은 자기 과시적이고 자기를 최고로 여기고 약한 자들에 공감하는 대신에 무시하고 깔아 뭉겝니다. 그들은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백마, 비스트(beast) 같은 특수제작된 방탄차량을 타기를 좋아합니다. 교만과 자기애와 극도의 이기심이 strong man들의 공통된 속성입니다. 그러나 나귀새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며 약하고 천한 자들을 체휼하시고 품으시는 겸손의 주님이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나귀새끼를 만났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나타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눈알을 부라렸습니다. 제자들은 쫄아드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평소같으면 주인이 난데 누가 쓰겠다는 거여하며 험상굳은 표정을 지었을 나귀주인들이 그래요? 그럼, 쓰세요하며 쿨(cool)하게 나귀 새끼를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그것을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두 제자의 헌신에 감동받은 다른 제자들도 하나밖에 없는 자기 겉옷들을 벗어 예수님께서 입성하는 길에 카펫처럼 깔아놓았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12제자,70문도,120문도,500여 형제 등 3년 반 동안 예수님께 양육받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 구원자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아 왕임을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평화를 땅에 가져다 주시는 왕이시기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됨을 찬송하였습니다. 이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거칠게 항의하였습니까?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한마디로 입 닥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천한 목수인 주제에 메시아 코스프레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내가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아 왕인줄은 나귀 새끼도 알고 나귀 새끼주인도 알고 이 사람들도 알고 나무도 풀도 돌들도 안다는 것입니다. 너희만 모른다. 너희가 이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면 돌들이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심을 소리쳐 증거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돌들도 메시아 주요 왕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은 왜 알지 못하고 애써 부인하는 걸까요? 바리새인들은 겉을 치장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외모와 조건을 따지기 좋아하고 경건한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고 쾌락과 세상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나귀새끼를 타고 뒤뚱거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목수 예수님은 메시아 깜냥이 안되어 보였습니다. 교만과 위선과 자기 죄를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을 판단만 하는 꼬인 마음이 자기 곁에 오신 주요 왕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을 내려와 기드론 시내를 건너신 후에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예루살렘의 높고 견고한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님이 왜 우신 것입니까?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을 보고 메시아라며 방방 뜨는 제자들을 제발 입 닥치게 하라는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성의 기득권 세력이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으라고 외쳐댔던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권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 타고 입성하신 것은 평화에 관한 일을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에 나귀 새끼보다도 더 비천한 어린 양이 되셔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죄와 온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죄를 뒤집어 쓰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가장 낮은 자 천한 자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오신 그들의 주요 왕인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교만과 탐욕과 음란으로 눈이 가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심판을 당하게 됩니까?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매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로 인하여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훗날 티투스 황제)에 의해 심판을 당합니다. 성 안에서 항전하는 예루살렘성민들을 토성작전으로 진압한 후,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다 무너뜨리고 로마에 저항하면 이렇게 철저히 파괴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다 무너뜨리고 성전 축대 벽면 한 곳만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전 통곡의 벽입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때도 솔로몬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는데 656년 후에 헤롯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져 통곡의 벽면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인간의 반복되는 반역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악을 반복하며 심판당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할 일이 없어 나귀새끼 타고 뒤뚱거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겠습니까? 이것은 암탉이 제 새끼를 모으려 함과 같이 어찌하든지 겸손과 온유과 사랑과 평화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그 품에 품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나귀 새끼보다 더 천한 어린 양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까? 십자가 죽으심이 완악하고 교만하고 음란한 죄인들의 마음을 여는 하나님의 보살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성육신으로 낮아지시고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겸손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희생을 거부하면 나와 내 태에서 난 것들이 땅에 메어침을 당하고 내 존재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철저히 무너지는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아직도 저 자신과 아내 송경희 집사와 지헌이, 하영이가 주의 것인지 모르고 왜 저와 아내와 자녀들을 구속역사에 써주시기 않는 거예요? 떼쓰는 기도를 하는 저의 죄를 보게 됩니다. 자녀들이 주님의 것인지도 모르고 9년이 넘도록 신천지에 매여있는데 왜 아직까지 풀어주시지 않는 거예요? 주님도 풀어주시기 힘들 만큼 흉악의 결박이 너무 세서 박혀서그런가요? 하는 의심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에 꼬리를 물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을보게 됩니다. 제 자신이 바리새인들처럼 교만과 탐욕과 정욕과 음란과 이기심에 눈이 멀어 고난으로 위장해 오시는 메시아 주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말 안 듣는 아내, 이단에서 헤매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통한 심정이 듭니다. 목장 지체들도 이혼위기에 불화의 위기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습만 보이고 지체들의 모습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이 밝히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저와 아내와 자녀들과 목장지체들과구원을 위하여 전도축체에 초청하고자 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보살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여 살아감으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이로다는 감사와 찬송이 마침내 저와 아내와 자녀들과 지체들과 가족들의 입술과 가슴에서 터져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적용하기) 주가 쓰시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저와 아내와 자녀들과 지체들과 가족들이 흉악에 매인데서 풀려 구속역사에 쓰임받을 것을 믿고 찬송하며 말씀대로 믿고 누리고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