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0.토.사무엘상 17장 31-40절 나를 건져내시리이다
주님 말씀하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다가 아버지가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집에 가보니 자신이 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 선지자 사무엘을 처음으로 대면하였습니다. 일곱 형들은 김 센 표정으로 막내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느끼며 그를 똥 씹은듯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형들에게는 내놓지 않았던 기름병을 꺼내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그 후다시 들판으로 보내져 아버지의 양들을 쳤고 20세 이상이었던 형들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갔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목동 다윗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여전히 양이나 치는 목동이었지만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낙심하지 말 것이라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사울에게 전하였습니다. 누구 하나 골리앗과 맞짱 뜨려고도 않고 심지어는 믿음 좋은 요나단마저 골리앗과 상대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왠 목동 소년이 골리앗과 맞짱 떠서 이길 때 무엇으로 보상하겠냐? 큰 소리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이 당장 다윗을 불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악령에 들릴 때 궁중에 부름 받아 수금을 타서 쫓아준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상태가 좋아지자 오랫동안 다윗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본 사울의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과 수심과 절망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골리앗 때문이라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어떻게 위로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장대한 골리앗의 압도적인 신장과 무기와 그의 육두문자가 섞인 공갈과 협박을 들을 때 사람이 낙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윗은 왕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를 씀으로 사람이라면 낙담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임을 사울도 수긍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여기서 주의 종이라는 표현은 왕인 사울의 종이라는 일차적인 의미도 있지만 다윗에게는 자신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주의 종이라는 자기 인식이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흔히 갖는 용기와 담대함 이었다면 기름 부음 받은 이후의 그가 가진 담대함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과 자존감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되신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자존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분노를 느끼고 반드시 심판을 하여 그놈의 망령된 주둥이를 그치게 하고 말겠다는 결의에 불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주의 종이기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두려워할 골리앗의 가공할 외모와 낙심하고 말 비방을 듣고도 전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저놈의 주둥아리를 심판하고 말리라는 영적인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은 죄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군대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능멸하고 모욕하는 사탄의 참소와 비방에 대하여 영적인 분노를 느끼고 처단하고자 하는 결의를 느끼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원 지하철에서 저는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먹잇감을 찾아 눈길을 요리 조리 돌이는 죄인입니다. 특히 콩나무 시루 같은 만원 전철에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스킨 쉽을 허용하며 악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이 전철을 나오는 순간부터 부끄럽고 실망스러웠습니다. 서로 이름을 모르는 익명의 섬이 된 밀집된 공간에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합리화로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세상 사랑하는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는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전철 속에서 익명의 섬처럼 의식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전철에 있는 저를 보시고 심지어는 저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제가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는 자기 인식을 가지고 평범한 악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고, 니가 그러도도 하나님의 종이냐? 기름 부음 받은 자냐?#039고 끊임없이 저를 비방하고 낙심케 하는 사탄의 참소를 대적하고 물리치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건져내셨은즉
다윗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 이니라며 여전히 그를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사울에게 어떤 자기 간증을 합니까?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다윗이 목동 생활하면서 수없이 양들을 늑탈하려는 사자나 곰의 출현을 목격하였습니다. 그가 앉으나 서나 돌맹이를 모아 물매에 넣어 돌 던지는 물맷돌 연습 끝에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된 것도 사자와 곰의 공격이 위협적이었고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에는 그에게는 사자와 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사자나 고양이는 큰 개나 큰 고양이나 다름없은 짐승으로 평가절하하는 분별력과 가치관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기름 부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과 사람과 짐승과 사건을 한없이 절대화해서 보지만 기름 부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과 사람과 짐승과 사건을 상대화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분별력과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민수기 14장 - 열 점탕꾼 vs 두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 개나 고양이에게는 물맷돌도 필요 없고 막대기로 충분한 것처럼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막대기 들고 따라가서 그 놈의 대가리를 뭉둥이로 후려치고 깨갱대는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습니다. 그것이 정신 차리고 일어나 그를 해하고자 하면 電光石火(전광석화)같이 그 기다란 수염을 부여잡고 수염을 뽑아버렸고 또다시 깨갱대는 사자와 곰을 이제 주먹으로 인중과 눈알과 콧잔등을 사정없이 쳐 죽였습니다. 사자와 곰이 빨라도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어 속절없이 기습펀치를 허용하고 들판에 쓰려졌습니다. 맹백한 팩트를 통해 주의 종인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힘과 권세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제 담대하게 사울 앞에서 고백합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이리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종 앞에서는 사자도 곰도 한낮 개과 고양이과 짐승일 뿐입니다.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짐승과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담대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런 담대한 고백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이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다윗을 날카롭고 강한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보호하시고 이빨의 공격에서 건져내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없이 허우대만 큰, 힘만 센 無腦人(무뇌인)에게서 건져내시리라는 강한 확신과 믿음으로 다윗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겼습니다.
자연인은 사자와 곰과 골리앗의 힘과 파괴력을 알기에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자와 곰 토템을 섬기고 골리앗을 우상시하고 우리의 수호신이라며 신격화하며 크게 봅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 받은 종,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해 계시는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와 곰과 거인 골리앗을 작게 봅니다. 우주 안에서 지구는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육체도 미모도 권세도 부도 명예도 먼지와 같이 소멸해 갈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듭났다고 하고 성령님이 제 안에 계시는 살아있는 성전으로 자처하지만 저의 눈은 여전히 삐어있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맨 눈으로 보기에 그저 크게 보이고 그저 이쁘게 보이고 그저 두렵고 부럽게만 보입니다.
저의 눈알이 할례를 받지 못해서이고 근본적으로 저의 마음이 팔복의 말씀으로 할례 받지 못해서임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팔복 말씀 강해안을 순차적으로 읽고 풀어 주일 가정예배 말씀을 전하고, 최근 담임목사님 저서 붙회떨감을 사서 읽었는데도 말씀을 준비하고 전할 때만, 책을 읽을 때만 감동을 받고 변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서면 다가 서는 세속사 앞에서 여전히 이쁜 게 좋고, 강한 게 좋고, 잘 나가는 것이 좋은 것이, 제 안에 무너지지 않는 바벨론 음녀요 산당입니다.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바벨론 음녀의 산당을 뽑고 부서뜨리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말씀을 듣고 심고 적용하고 건설하는 이 죄고백과 회개는 제가 죽은 순간까지도 계속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50:50(세상 vs 하나님)이 40:60 30:70 20:80 10:90이 되어 마지막에는 1:99쯤 되어도 그 부족한 1%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저의 실존이고 죄인인 기본값입니다. 100% 죄인으로 세팅되어 있는 기본값을 단번에 0으로 초기화시키고 100% 의인으로 만들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제가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므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구체적으로 적용하므로 실제적인 삶에서 천국을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돌 다섯과 물매
이에 서울이 다윗의 간증을 듣고 설득이 되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하고 곧 벗었습니다. 대신 손에 자기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것이 좋아 보인다고 사울의 것을 착용하고 폼을 잡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맞지 않은 보호 무장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평소대로 맨몸에 짐승 때려잡던 막대기와 짐승의 정수리를 맞추어 쓰러뜨리는데 익숙했던 한 매끄러운 조약돌 다섯을 시내에서 주어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영적인 실력은 평소에서 얼마나 평범한 삶을 잘 사는가에 의해 드러납니다. 다윗은 양치면서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수없이 돌팔매질로 표적을 맞추는 연습을 했고 막대를 휘두르며 사자와 곰의 weak point를 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랬기에 사자와 곰의 갑작스런 출현에도 당황하지 않고 평소에 쌓아둔 연습이 실전에서 100% 실력 발휘가 되었습니다. 골리앗은 사자와 곰보다 휠씬 큰 데다가 중무장하고 칼과 창을 들고 욕설과 저주와 험담을 끊임없이 따발총처럼 쏘아대지만 자신은 막대기와 물맷돌 몇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막대기와 물맷돌이 자신에게 익숙한 최적화된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뒤에는 자신을 전신으로 감싸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실린 단 한 번의 패대기질, 단 한 방의 물맷돌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노벨상 시즌이 되면 노벨상 작가의 저서나 후보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이었습니다. 작년 수강 작가 폰 요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과 유력한 후보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라는 작품을 읽었는데 너무 지겹고 재미가 없어 읽다가 중단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을 체험하여서 이번에 한강이 노벨상 받을 것 같다고 나름 예측하였는데 희미한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와 다른 책들을 유심히 듣고 보는 과정에서 그가 노벨상을 받을 만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동시대 작가들이나 유명 작가들의 책을 안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한강은 유명 작가가 된 이후에도 최근에 발표되는 덜 알려진 동료 작가들의 소설이나 시집을 사서 끊임없이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이 그의 루틴(routine,일과)이라고 합니다.그의 작품은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과 경향과 시대성과 예술성이 반영되어 나온 최종 산출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 되기 위해 이처럼 글을 읽고 쓰고 벼르니 그의 문체가 인간의 고통에 직면하고 슬픔을 통과하여 애도하는 시적 산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주일예배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목사님 저서 요한계시록 로마서 마태복음 시리즈 한 쳅터를 거의 6~8번 정도 읽고 소화하여 말씀을 준비하고 전합니다. 그런데 목장에 올리는 토요 큐티 말씀 묵상은 새벽부터 아침까지 비교적 여유롭게 써서 끊임없이 수정하여 홈피에 올리지만 주일 밤 9시에 전하는 설교는 내용이 너무 부실하고 오타도 많고 전하는 발음도 부정확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말씀이 익숙한 상태로전하여야 하는데 너무나 거칠고 다듬지 않은 체로준비하고 전하였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보다도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그 본문 말씀을 읽기만 하지 말고 그 본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치열하게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의 말씀에 파워가 실리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선교단체에서 35년 말씀 묵상하고 전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 때나 우리들교회에 다니는 지금이나 여전히 말씀만 강하고 적용(application)이 약하여 이상과 현실이 괴리 된 것이 저의 실체입니다. 제가 이제 말씀을 듣기만 하며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듣고 읽고 묵상한 말씀을 붙잡고 하루 하루 적용하여, 저의 인생이 모래 위에 쌓은 집이 되지 않고 말씀의 반석 위에 기초를 내리고 지어지는 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적용하기) 만원 지하철 속에서 의도적으로 이쁘고 젊은 이성 곁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그 날 큐티 본문 말씀을 묵상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