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왜?’가 없다
인도에서 선교를 하던 핀란드인 여선교사가 폐병에 걸려 사역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휴양하며 농사일을 돕던 중에 이번에는 탈곡기에 팔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오른쪽 팔을 잃고 이 선교사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 폐병으로 사역지를 떠나고 이제 오른 팔을 잃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이 선교사는 ‘왜?’라고 하지 않았다. ‘왜’라는 물음 대신 ‘무엇을’이라고 기도함으로써 고난의 현실을 극복했다.
나이가 들어서 죽건 병으로 죽건, 선교사님처럼 불의의 사고를 당하건 죽음과 질병은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삶의 과정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음과 부상을 겪을 때 우리는 억울함과 분노로 더 큰 아픔을 느낀다. 왜 나에게,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조차도 그 뜻을 알 수 없어 절망할 때가 있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새벽기도에 다녀오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뺑소니 사고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범인을 찾지 못했다. 사고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새벽기도 때마다 교회 청소를 하느라 작업복 차림이던 주름이 조글조글하시던 어머니의 시신 아래에는 ‘30대 여인’이라는 푯말이 걸려있었다. 외상도 없이 돌아가신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통해 가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던 친정아버지도 바로 그 주일부터 교회에 가시고 장로님으로 섬기다가 돌아가셨다. 물질로 남겨주신 것이 없어도 생전에 보이신 믿음의 모습이 큰 유산이 되어 나와 가족들을 살린 것이다.
‘왜’ 대신 ‘무엇을’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엘리야 선지자가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고 승천할 때의 말씀이다. 어쩌면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가 떠난다는 불안함과 함께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는 불말과 불수레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철없는 나이에 맞았던 어머니의 죽음도, 삼십대 후반에 겪은 남편의 죽음도 불말과 불수레 같은 갑작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본질은 엘리야의 승천과 같은 구원의 사건이었다.
끔찍한 불수레와 같은 일도 말씀으로 해석해 주시면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이 있다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왜?’가 아니라 사건을 통해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100% 옳으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왜’가 없다. 두려운 불수레의 사건이 찾아올 때 예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머니 한 분의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와 가족들을 살렸다. 남편이 죽음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것이 나의 간증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했다. 고난 속에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한 사람이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린다고 믿는다.
갑작스런 병이 찾아왔는가? 배우자가 외도를 했는가? 자식이 집을 나갔는가? 원망과 분노와 연민으로 내 삶을 낭비하지 말자. 고난의 종류와 크기가 어떠하든지 그 사건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무엇을 할까 묻자. 날마다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며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할 때 불말과 불수레 같은 모든 사건이 구원의 사건이 된다. 힘든 사건이 도리어 자녀들에게 남겨줄 가장 귀한 유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