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간 말하지 말라
창31:17-42
4세기의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근엄하고 의로운 수도생활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인했고, 인간이 선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와 금욕설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도덕과 윤리적 기준으로는 형편없었지만 어머니의 기도로 회심한 어거스틴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얻어지는 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추종하겠습니까? 선과 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왜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본문을 통해서 봅니다.
선한 자도 악한 방법을 씁니다(17-20). 20년간 하나님께 훈련받은 야곱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외치지만, 재물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다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알리지 않고 도망가려 합니다. 원칙이 아닌 악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용의주도하게 라반의 눈을 피해 도망하면서도 드라빔을 훔친 라헬을 분별하지 못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20년 전 브엘세바에서 도망했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기에 망정이지, 무모하고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행동으로 다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의 악한 방법을 만나게 하십니다(21-24). 야곱 일행이 열흘간 열심히 도주했지만, 사흘 뒤에 이 사실을 알아챈 라반이 이들을 추격합니다(22-23). 라반은 야곱이 열흘 걸린 길을 칠 일만에 따라잡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들키는 것이 축복입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이렇게 악한 방법을 쓰는 데서 자유롭지 못함을 봅니다.
결국 야곱과 라반 사이에 선악간의 시비가 일어납니다(26-42). 라반이 말도 안 되는 소리와 그럴듯한 말을 섞어 가며 야곱에게 따집니다(27-28).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하나님을 들먹이지만, 핵심은 “왜 드라빔을 훔쳐갔느냐(30)” 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것이 라헬의 소행임을 모른 채 드라빔을 훔치지 않았다고 맹세하고 장담합니다(31-32). 라헬도 드라빔을 찾으러 장막에 들어온 라반을 감쪽같이 속이고 남편의 이익을 위하지만, 자기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이익을 구하는 이타적인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결국 야곱이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분을 내며 라반을 책망합니다(36-42).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선악간에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간의 시비가 있어도 말하지 말라 하십니다(24,29). 이렇게 믿는 야곱과 믿지 않는 라반이 별 차이가 없기에, 자기 죄만 보고 가야 합니다. 선악으로 논하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믿는 우리가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것과 같은 천하보다 귀한 구원을 받고도 내 곁의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내 곁의 안 변하는 식구들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면서, 교회 안의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품게 됩니다. 내 죄를 보지 못하기에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감사가 없고,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을 옥에 가두면서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환란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과 함께 가는 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선악간에 시비하고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곳곳에 사상과 감정, 관계의 대립이 난무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경에서 선악간 이야기를 하며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죄를 보며 은혜를 깨달아 구원의 언어를 쓰는 저와 우리들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3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