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소망]
행 23:6~11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야망이나 욕심이 아닌 성령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소망에 대해서 말씀을 듣도록 해보겠습니다.
첫째, 죽은 자의 소망입니다.
공회 앞에 서 있는 바울은 사람이 보기에는 죄인으로 공회 앞에 서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복음 때문에 공회를 소집시키고 바울 앞에 공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죽은 자의 소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죽은 자임을 알아야 부활을 소망하는데 사두개인들은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 부활을 소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에 다윗의 제사장 사독이 있는 만큼 자기들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대대로 대제사장과 제사장을 담당하면서 정치, 사회, 정치, 종교를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과 같은 이 땅에서 오히려 부활할까 봐 걱정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전제되는 것입니다. 반면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을 타파하자고 일어난 바리새인들은 이상주의자였고 개혁파였습니다. 그러니까 귀족이 아닌 평민도 율법만 잘 지키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만 그것은 그들의 명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거룩함을 외치면서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기려고 했습니다. 이런 포장으로 대중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칠한 담은 바리새인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교만한 자아가 펄펄 살아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합니다. 자아가 죽지 않았으니 부활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깨닫는 사람은 저절로 부활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학설은 모두 바리새의 경건과 사두개의 쾌락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없으면 다 똑같이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양심은 선한 것이 없고 인간은 100%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나 경건이나 주님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며칠 전 작고한 이어령 교수는 마지막 수업에서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정기적으로 만나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삶이 풍성해진다. 나이 차이, 성별, 직업에 관계없이 함께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장은 수다를 넘어서 진솔한 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신분 격차 차별 없이 다 친구가 됩니다. 서로 죄를 보는 사랑의 만남이 가장 차원 높은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있어도 수다 떨 친구가 됩니다.
둘째, 다툼 가운데 소망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공회가 딱 둘로 나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바리새인과 부활을 하나로 묶어서 자신이 지금 그 이유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은 마치 자기들이 심문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사두개인들은 바울을 향해서 또 바울과 한패인 바리새인을 향해 분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바울을 조사하던 공회가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리새인 중에서도 율법의 전문가 중 전문가인 서기관 몇 사람이 바울에게서 악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으면 어떻게 하냐, 내버려 두라며 바울이 무죄라고 합니다. 아무도 회개하는 사람이 없으니 싸움이 큰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얼마나 심하게 싸웠으면 보고 있던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 의해 둘로 찢겨 길까 걱정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니 부하들을 시켜서 무리로부터 빼앗아서 영내로 들어오게 합니다. 우리도 다툼과 분쟁이 있을 때 부부목장은 다들 찢겨 질까 하여 빼앗아서 목장으로 빨리 보내야 됩니다. 말씀이 내 속에 던져지는 목장에서 설령 내 마음이 찢겨 졌더라도 목장으로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분쟁이 성령의 소망이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이 다툼을 통과하면서 세상 소망은 더욱 없어지고 천국 소망이 더욱 간절해졌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소망은 고난을 겪을수록 줄어듭니다. 그래서 너무 싫은 다툼도 내 구원을 위해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갈등은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지만, 분열이 되면 생명력을 잃고 자멸하게 됩니다. 나아가 갈등은 이 세상 소망이 무너지고 성령의 소망을 가지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사명의 소망입니다.
11절에 그날 밤 주님은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지쳐서 위로가 필요한 이 밤에 그 차디찬 감옥 방에 찾아오시고 곁에 서서 위로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말씀이 있고 기도하면 반드시 말씀으로 위로해주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주님과의 교제가 실제적인 큰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 때문에 살고 사명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것을 왜 당하는가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가 되어야 됩니다. 내가 당한 것을 목장에서 그냥 증거하면 됩니다. 환란과 결박이 있는 곳에서 이 일을 증거하면 우리들의 로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위로와 말씀의 위로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령의 소망은 이렇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사명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줄 믿습니다. 다툼의 소망이 사명의 소망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편안해진 상황에서 예배가 무너진 어느 부목자님의 이야기입니다. 큐티도 안 하고 예배도 잘 안 드리니 목장에서 골프 친 나눔 정도로 수다만 떠는 것 같아 부목자를 내려놓겠다고 하셨는데 올해도 부목자로 올려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목자를 도와주지는 못하고 예배도 큐티도 안 하고 그저 놀러 다닌다는 나눔을 할 수 없어 목장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전 예배에도 안 나오던 아들이 '엄마 요새 교회 안 나가는 것 같네? 살만해졌나 봐.'했는데, 이 말이 천둥소리처럼 들렸고, 오랜 아들의 수고로 죽을 것 같았을 때 우리들 교회에 나와서 큰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좀 살만해졌다고 자신이 이러고 있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자신의 현주소를 보게 해주셨고 일단 이번 주일 현장 예배부터 드리자고 목자가 권면을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살만하면 모든 사명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인간은 다투어야 되며, 부부간에도 다투는 가운데 엄청난 소망을 보게 됩니다. 육이 무너지고 영이 세워져 다툼가운데 세상 소망이 점점 없어져 사명의 소망으로 나가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