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황홀]
사도행전 22:17-21
공노비에서 성군인 세종의 후궁이 된 신빈 김씨는 황홀 그 자체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신부로 뽑아 주시는 이 택하심은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황홀에 대해 말씀을 듣겠습니다.
첫째,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황홀을 보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회심을 하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보낸 다음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입니다. 막상 주님 만났고 사명도 받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사람들 앞에 설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면서 그렇게 3년을 광야에서 회개의 때를 지냈습니다. 이렇게 광야의 양육을 통해 내 죄를 알게 되고 그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성전에 돌아와 주님께 납작 엎드려 기도하니까 성령께서 황홀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내 의식을 넘어서는 상태, 내 존재를 넘어서는 상태, 나를 초월하는 경험을 하는 자리를 엑스타시스 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황홀, 성령의 엑스타시스는 자아에서부터 출발하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부인입니다. 즉 십자가 길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말씀대로 하는 기도는 밑도 끝도 없는 내 생각을 정리해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홉킨스 박사는 의식혁명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책을 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의식 수준을 영성 지수로 나타내어 20에서 1000까지 구분을 했는데 가장 낮은 20은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성 지수가 200 이상이 될 때 비로소 세상에 보탬이 되는 존재라고 보는데 그 기준이 용기라는 것입니다. 용기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출발점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700에서 1000까지는 깨달음이 최고의 지수인데 이것이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둘째, 내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바울은 겸손한 죄인의 모습으로기도 하는 중에 성령의 황홀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 황홀한 중에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비한 체험과 경험보다도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깊은 기도 가운데 성령의 황홀한 중에 있는데, 아예 예루살렘에서 즉시 나가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울의 사역지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찬물을 확 끼얹는 듯한 이 거부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그전에 황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조금이라고 더 잘 듣게 하시기 위해서 때에 맞게 황홀함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황홀의 목적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없는 황홀은 인간의 황홀일 뿐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 것은 기도할 때 주신 주님의 말씀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제자들의 충고와 도움이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떠날 때는 이런 공동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바울에게도 지체가 조금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알려주실 때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공동체 지체들과 나눔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최고의 황홀은 기록된 말씀을 오늘 선포된 말씀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이 최고의 황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면 증인의 사명을 주시는데 그때 이 황홀함이 없으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셋째, 자기 확신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 전도에 딱 맞다고 확신했는데 주님은떠나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내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사도라는 아포스텔로와 밖으로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엑스 아포스텔로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낼 때 이 기가 막힌 단어를 써서 주님이 너를 얼마나 기대하는지, 삼위하나님이 모두 너를 보호하고 도와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황홀의 목적은 결국 멀리 있는 이방인에게 보내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황홀의 목적은 안주이지만 성령의 황홀의 목적은 보내심, 파송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러 파송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황홀하게 하시고 말씀의 깨달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황홀의 결론은 자기 확신이 아닌 순종입니다. 멀리 있는 이방인,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그 한 사람, 미운 그 가족, 그 지체, 그 이웃에게 보내시는 주님께 순종하라고 성령의 황홀가운데 말씀이 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손해 보는 것 같은 현상 너머에 있는 성령의 택하심과 성령의 황홀, 그리고 나를 도와주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받은 사랑을 알면 우리가 그때부터 감사하고, 감사를 깨달으면 순종하게 되며, 이것이 성령의 황홀의 결론입니다.
공동체 고백으로 신빈 김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세종의 사랑하는 후궁 신빈 김씨와 부인 소헌 왕후는 각자의 사연으로 한이 맺힌 사람들이었지만, 서로 우애가 깊었습니다. 세종 또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부인들 때문에 날마다 관노비, 공노비 이야기를 들어서 백성들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런 모든 상황이 한글 창제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신빈과 소헌 왕후의 아픔이 수백 년 후 한국의 발전을 위한 최고의 약재료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신빈에게 아픔을 허락하셔서 한글 창제를 돕도록 역사하신 이 이타적인 역할이 진정 성령의 황홀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의 황홀은 힘든 곳에 다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 보게 되며, 내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확신이 아니라 순종을 하게 되어 모두를 살릴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성 지수가 200 이상 되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15%만 있어도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된다고 합니다. 내 노력이 아니라 주님 말씀 듣고 성경 펴 놓고 같이 공동체에서 나누고자 하는 것이 수백의 상승을 가져올 수 있는 비결이고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