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영접]
사도행전 21:14-18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성령의 전송을 받음으로, 두로ㆍ 돌레마이ㆍ가이사랴에서는 성령의 각오로 화해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똑같은 각오이지만 나를 위한 각오로 너를 죽일 때는 다 원수가 되지만, 성령의 각오로 내가 죽으면 화해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위해 나가는 자에게는 새해 첫 주일에 주님께서 영접해주신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영접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동역자와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만류하면서도, 항상 나누고 묻는 공동체였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참뜻을 알았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바울의 각오는 어리석은 고집과도같이 보였지만, 바울은 그 각오를 통해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이 땅에서 세상의 조류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결박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위해 올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같이 가는 우리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과 고정관념이 이방인들의 돈까지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흉년인 이때를 이용해 복음 전할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전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방교회에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의외의 몇 제자가 여장을 꾸립니다.
바울 일행은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렸다고 합니다. 빌립과 화해하고 동행을 바라며 여러 날을 머물렀지만, 기대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울 일행만 여장을 꾸립니다. 우리는 올라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알고, 이 땅에서 여장을 꾸려야 하는 나그네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고난으로 인한 사명은 여장을 꾸리게 합니다. 그러나 빌립처럼 부요하면 힘든 오르막길인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마음의 준비뿐만 아니라, 짐을 꾸리는 실제적인 준비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바울이 전한 말씀에 은혜를 받은 가이사랴 성도 중 무명의 제자 몇 사람이 바울을 따라나섭니다. 이들은 성령의 각오로 환란과 결박뿐 아니라 죽음까지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과 동행하는 지체가 되는 수고를 감당합니다. 그 중 나손이 등장하는데,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부터 함께한 오랜 제자이며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브로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으로서 가이샤라 교회와도 친밀했고,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묵을 숙소를 제공할 수 있는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바울은 나손과 함께 올라가며 예루살렘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복음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목장을 하면서 목원들에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 여장을 꾸리는 준비를 하고 정보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주님이 영접해주시는 사람은 늘 의외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이 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제자양육이 되어 2000년 동안 바울과 어려운 예루살렘 행에 동행했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구원 때문에 십자가 지고 앞장서는 한 사람을 볼 수 있고, 함께 가고 도울 수 있습니다.
올 한해도 각 목장에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준비를 하시고 자존심 내려놓고 도우시며 , 주인공 되기보다 의외의 몇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이 땅의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 17절 이르니에 는 드디어 우리들이 도착한 그때, 즉, 큰 환란이 닥칠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니까 형제들이 기쁘게 영접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달려온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한 명도 영접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생색을 내지 말고 이 땅의 질서를 인정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까지 항상 등장했던 우리라는 표현이 27장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우리가 한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우리라는 단어를 여섯 장 동안이나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혼자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전도 여행이 다 끝났습니다. 내 십자가를 어느 누가 대신 질 수가 없습니다. 나손과 제자들이 옆에서 정보도 주고 도움은 되었지만, 결단은 내가 해야 하며 내 손과 발이 가는 수고로 피 흘리는 십자가 적용을 해야 합니다. 이튿날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납니다. 바울이 야고보에게 들어가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성전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당시 핍박을 받지는 않았지만 큰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위해 유다서를 써서 이단 사설을 다룰 정도로 훌륭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절대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천년 후 베드로와 바울이 야고보보다는 오히려 크게 쓰임 받았음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부부 목장 나눔을 보니, 권찰님이 공부를 못하는 중3인 막내에게 점수가 바닥이라고 나무라니, 아들은 오히려 자기 뒤에 세 명은 더 있다고 합니다. 너무 뻔뻔해서 어이가 없었지만, 남편 목자님은 우리 집안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막내가 청큐 집필진이고, 큰아이와 둘째 아이 모두 청큐를 썼으니,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권찰님도 바로 맞장구치시며 '공동체에 붙어만 가는 것이 수지맞은 것이고, 저희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이사도 가게 해주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같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이 가정은 너무 힘들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영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믿고 세 자녀 낳고 자녀들 모두 청큐 집필진, 아버지는 큐티인 집필진으로 섬기셨으니 정말 의외의 제자인 것이 맞습니다.
말씀 맺습니다. 성령의 영접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때문에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외의 몇 제자가 여장을 꾸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의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성령의 영접을 받는 분들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부활이고 죽음은 부활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닥쳐도 그 끝이 시작임을 알고 절망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