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은혜로]
사도행전15:1 -11
심 한섭 목사
바울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제가 그 편지의 인사말을 인용하여 너무나 사랑했던 우리들 교회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저 심 한섭은 우리들 교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우리들 교회 모든 성도 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저는2014년 욥기말씀 적용으로 우리들 교회를 떠났다가7년 만에 이렇게 와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섬김의 흔적과 생명의 간증을 나눈 우리에게 여전히 양육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성화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구원의 은혜를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닫고 믿음도 있는 내가 왜 쉼 없이 양육을 받아야 할까요?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십니다.
첫째,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구원을 말하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데,이들 주장의 요지는할례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니,이 정도의 삶은 살아야 구원받은 자라며,구원받은 자임을 증명해 보이는 행위의 징표 없이는 구원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처럼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위와 율법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행위와 은혜의 미묘한 관계를 두 가지 정도로 설명해보려 합니다.
1)행위와 은혜를 이해할 때 순서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다시 말해 행위는 은혜 다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의 율법과 행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자녀 양육에서도 엄마 말을 잘 듣고 숙제를 알아서 하면 착하고 훌륭한 아이라고 합니다.세상은착하고 나쁘고라는 율법과 행위의 굴레 안에서 돌아갑니다.올바른 행위도 중요하지만,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의 뒤에 따라옵니다.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2)율법은 인과응보를 말합니다.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무엇을 안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지만,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되지만 그러한 인간의 논리와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내가 예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복을 받는 거라면 이 예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조차 부부지간에서나 자녀를 대할 때 계속해서 율법과 기복으로 대하고 그것을 논리와 합리라고 표현하며 억지주장을 합니다.
둘째,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등 몇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가는 도중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들러 믿지 않는 자들이 믿게 된 간증을 들려줍니다.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다시 말해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합니다.하지만 모든 공동체가 기쁨으로 하나님의 행하신 은혜의 일을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그들은'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이게 맞다,저것은 틀리다.'라며 옳고 그름만 주장합니다.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끝까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합니다.항상 그것을 따지느라 공동체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기뻐하지 못합니다.그럼에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세상이 옳고 그른 기준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느냐,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살아도 된다는 말이냐,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명확한 잣대가 존재해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도 유지가 될 수 있을게 아니냐'라며,
물을 수 있지만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같은 죄인을 값없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셋째,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러 모였지만 이런 사람들도 구원의 문제에 확신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이것이 우리가 여전히되었다 함없이 계속해서 거룩을 향해 구원과 양육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입니다.갈라디아서2:11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바울에게 책망 받습니다.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오늘 그는 자신에게 쓴 소리했던 바울의 편에 섭니다.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우리는 내가 목자니까 목원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차별합니다.오늘 베드로가 설명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셨고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목자가 되고 부목자가 되고 직분 맡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목원이 많이 아프고 연약하다고 차별하면 안 됩니다.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우리가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프던 순간에 우리를 받아주시고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내가 누군가보다 나은 사람이고,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에 차별이 없다는 뜻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안 될 게 뭐가 있어?,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관계는 단절됩니다.하지만 차별이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베드로는 형제들을 향한 그의 차별 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차별 없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형제들아!'라고 부르며 관계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양육 받고 성화 되어가야 합니다.이제는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 육체가 아닌 성령의 일을 주목하고 옳고 그름이 예수 안에 있음을 믿으며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해야 합니다.내가 더 아픈 사람이었다고,내가 차별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해 손을 내밀어야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우리들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