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돌보심]
행15:12-18
돌보심의 뜻은 슬픔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하고 방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돌보심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렬한 변론은 공회에 참석한 온 무리를 침묵에 빠뜨릴 정도로 확신에 차있고 분명하였기 때문에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온 무리가 잠잠해지자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다시 발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믿음이 연약한 유대주의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말했습니다. 불신이 가득한 유대인들이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다 믿는 것도 아니지만 일부 믿는 사람들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표적과 기사에 열광했지만, 진짜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일차 선교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는 돌질을 당했고, 또한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도 죽을 만큼 돌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전했고 복음이 전해진 것, 이것이 표적과 기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파송했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곳곳에 그들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했던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순으로 갔던 길을 거꾸로 되돌아오면서, 전했던 복음이 굳게 세워졌는지 확인하며 다시 돌아보면서 온것,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였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는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던 기사를 위주로 보고했고, 반면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눈높이에 맞추어 보고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1) 야고보를 심방하십니다.
예기치 못한 인물 야고보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베드로처럼 형제들아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와 달리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며 더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공회 의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도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에는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비난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당연히 사생아로 알았습니다. 처녀가 잉태했기 때문이고, 이는 돌로 맞아 죽을 일이었기에,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야고보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셨습니다(고린도전서15:7). 그때 하나님의 심방이 되어서 야고보가 단번에 변했습니다. 그러면 왜 야고보가 대답했을까요? 베드로의 변론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최후 판결을 위해 야고보를 공의회의 의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온 인류의 이방 선교를 위한 법적 판결을 위해, 야고보에게 이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야고보는 나도 예전에 너희와 똑같이 예수님을 비난했지만, 이제 변했다고 하면서 들으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의 역할은 어떤 회의가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아주 존경받는 의장 격인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모두가 공증하는, 즉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신분은 그 때에는 상상 못 하는 특권인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런 마음으로 나도 너희와 다름이 없다며 형제들아 외쳤습니다. 이렇듯 베드로도 야고보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이 세상에서 죄인일 뿐임을 인식했기 때문에 바로 형제들아가 야고보에게도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2) 이방인을 심방 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공회에서 많은 변론 후 대답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방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방 해 주시니 구원받았다는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돌보신 것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돌보심, 돌보셨다는 원형 헬라어 에피스켑토마이는 히브리어로는 파카드 입니다. 에피스켑토마이의 기본의미는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다입니다. 쉽게 말해 출석 체크가 기본 뜻인데, 이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의 표현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살펴보는 것이고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것이므로 방문한다는 뜻으로 이어지고, 교회의 심방도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즉 야고보는 베드로가 고넬료집을 방문한 사건을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방문하신 처음의 일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돌봄입니다. 권고하고 돌아보고 방문하신다는 것이 바로 오늘 성령의 돌보심의 뜻입니다. 그래서 돌봄은 심방입니다. 야고보도 이방인도 하나님이 심방 하시니 다 기둥 같은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셋째,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간증,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이 다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심방 하신다고 해도 최종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성경을 인정하지만,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삶과 행함이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야고보가 아모스 선지자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아모스9:11-12).
바벨론 포로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을 예수님만 지어 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선택된 유대의 남은 자와 이방인들로 주를 찾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 야고보는 아모스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당시 이방인이 사용했던 70인 역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본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구약 성경이지만 아모스는 유대인 중심, 야고보는 이방인 중심으로, 헬라어를 사용하여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많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것이 이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예언이고, 현재 이방인 선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말씀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나바와 바울, 베드로가 한 말과 그 이전에 아모스 선지자가 말한 게 똑같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주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아무리 우리가 돌보아도, 또 내가 돌봄을 받아도 이렇게 성경과 일치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심방해주셔 성령의 돌보심이 가득한 한 주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