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박해]
행12: 1-4
성령의 부조를 하고 난 후 박해가 일어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복음이 흥왕해지면 곳곳에서 박해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헤롯 밑에서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 살펴보며 성령의 박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세속정치의 박해를 받아냅니다.
안디옥교회가 세워져서 바울이 잘 가르치니까 흉년의 예언에도 놀라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도리어 흉년이 심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본 것은 흉년보다 더 힘든 그곳의 박해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의 할아버지 헤롯 대왕과 같이 사치스럽고 간교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유대를 잘 다스려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어야만 하니 그들의 의식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헤롯이 그들의 골칫거리가 바로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지도자인 사도들을 죽여서 환심을 사고자 합니다. 헤롯은 유대인과 하나가 되어 국가권력을 갖고 정치적 박해를 행해 기독교를 말살하고자 한 것입니다. 헤롯 가문에 대대로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사탄이 배후에 있는 것을 알고, 흥분하지 말고 반대의 영으로 침착하게 받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혼 안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반대의 영으로 나가서 배우자에게 신뢰를 받아서 그가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에서도 항상 믿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끼리는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 잘못한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만 따지면 다 똑같고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쪽이 십자가 지고 본을 보여야 합니다.
둘째, 한 줄 순교의 상도 허락하십니다.
야고보가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2절). 스데반의 순교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첫 순교였다면, 야고보의 순교는 열두 사도 가운데 첫 번째 순교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사도 요한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 우레의 아들인 야고보가 동생 요한을 시기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주님의 양육으로 불같은 혈기와 모난 부분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가장 훌륭해서 첫 번째 순교의 상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요절해서 최초의 순교를,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돌보라는 명령을 받고 죽을 때까지 유배되었습니다. 섭리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providence) 하나님께서 미리 본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불공평해 보이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사실은 야고보가 좀 먼저 죽었다뿐이지 후에 모두 순교했습니다. 스데반처럼 멋진 순교나 야고보처럼 한 줄의 순교도 천국에 가면 똑같습니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 사소한 일에 혈기 안 부리고 죽어지는 것도 순교입니다. 배우자가 끝이라고 할 때 나도 끝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게 바로 순교입니다. 아무도 나를 안 알아주고 칼로 죽인다 할지라도 끝까지 가정을 중수해서 노벨 평화상보다 더한 구원의 상을 받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한 줄 순교의 상입니다. 정말 이 땅에서는 예수 믿는 것 이상도 이하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야고보에게 순교의 상으로 갚아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배우자를 이렇게 미리 앞을 내다보시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불의를 기뻐하는 동족의 박해도 받아냅니다.
유대인들이 야고보를 잡아 죽인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헤롯은 오직 여론의 행방과 지지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백성을 사랑할 수 없기에, 국민의 뜻이라고 하지만 실은 다 자기의 뜻입니다. 지지율이 올라가니, 이번에는 수장인 베드로를 죽이고자 합니다. 유월절에 사형을 못 시키는 것도 알기에 끝난 직후 처형하고자 군사를 풀어서 베드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는데 이는 더 큰 악을 조장하는 범죄입니다. 헤롯을 부추기면서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웃음 한 번 지어서 헤롯으로 살인죄를 짓게 합니다. 소위 믿는 유대인의 죄가 더 큽니다. 의를 알고 따르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 주인이 사단이라면 사단의 종이고 죄라면 죄의 종입니다. 헤롯과 유대인의 박해를 성령의 박해로 받아내려면 자유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2) 말씀처럼 우리가 일차적으로 진리를 알고,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압니다. 홍정길 목사님의 광복절 설교를 인용하면,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로, 하나님의 이름이 자유라는 것에 너무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진정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에 그 책임을 물어서 벌을 받는데, 하나님이 이를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구속의 정점이 자유이고, 예수님께서도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신 것이 바로 이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유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역 전체가 우리의 죄의 결박에서 풀고 하나님 자녀의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완전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유만 진짜 자유입니다. 모든 것의 마지막 판단은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보시기에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은 억압하지 않고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수 있게 하십니다. 다윗, 야곱 그리고 야고보의 인생도 너무 힘든 일을 겪었지만, 구속사로 꿰어지니 사건이 올 때 놀라지 않습니다. 내가 왜 갇혀? 내가 왜 망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깨달으면서 내 인생이 구속사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 성령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께 인도해야 하므로 세상과 같은 방법으로 전쟁을 하면 안 됩니다. 천국 소망으로 어떠한 성령의 박해가 오더라도 받아내고, 한 줄 순교의 상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우리 각자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