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변명]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인 초선 여자 의원이 상대 당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을 것 같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리를 높이지 않고, 상대 당을 비난 일색으로 도배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큐티하는 것처럼 성령의 변명이 되어 우리를 설득한 면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성령의 변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형제가 비난할 때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방인의 회심이라는 사건은 교회 전체가 초미의 관심을 갖고 협력해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회심 소식에 기뻐하기보다는 할례 안 받은 그들과 왜 음식을 같이 먹었느냐 따지고자 공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들의 식탁에는 레위기 11장의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부정한 음식도 섞여 있을 것이기에, 자기들의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할례자의 식탁에 참여하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할례받지 않고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교회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낳게 했을 수 있습니다. 비난했다고 하는 단어, 비난하여의 원형인 디아크리노는 구별하다, 분리하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지난번 10장에서는 의심치 말고, 차별하지 말고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이 똑같은 단어가 2절에서는 적대적 마음으로 자신을 상대방과 분리하다라는 의미에서 나아가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이 사람들이 비난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보면서 차별금지법이 겉으로는 차별하지 말자는 법 같지만, 그 속에는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면 결국 차별받는다는 의미의 법이라 생각됩니다.이방인들이 성령 받고 돌아왔어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기 보다는 시비를 가리는 본문을 보면서, 동성애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더라도 그 구원 자체로 기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합법화된 결과 외에는 모두 비난이 되는 것입니다.베드로에게는 동료들의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이렇게 비난의 말을 동료들이 먼저 하고 나선 것입니다. 성경과 인생의 주제인 편견을 계속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가 왕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왕따가 되었을 때 잘 대처하라고 미리미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부활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의 반대도 충분히 예견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차례로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도 고넬료 집에 가기가 너무 싫었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당해본 것만 설명할 수 있고, 안 당해본 사람은 위로를 못 합니다. 성령세례가 임하지 않으면 모두 다 이해 못 할 일이고, 성령세례가 임하면 우리 인생은 모두 다 이해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친절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을 때 마음을 녹여내는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서운할 법한 비난 앞에서 차례로 친절하게 솔직한 삶의 간증을 하는데 바로 이것이 성령의 변명입니다. 자신도 너희 할례 당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두 쪽이 그 집에 가기 싫었던 베드로가 하나님이 설득을 당했기에, 베드로도 그들을 설득해야 함을 배운 것입니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의 차이는 하나님이 만지셨는지 아닌 지에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나보고 먹으라 하셨을까 고민하며 묵상하고 있는데, 성령님이 함께 가라고 보내신 이방인 세 사람이 왔다면 이것이 성령이 명하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들으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적용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사람의 생각은 들어올 틈이 전혀 없었고 둘 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공회에서 고넬료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도 구원 얻을 말씀이 필요함을 보고한 것입니다. 성령은 베드로가 받은 성령,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이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10장부터 고넬료와의 만남에 대한 간증에서 느낀 것은 베드로가 정말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의 설교를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이야기만 한결같이 똑같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능히 막을 자가 없어서 통했습니다.
간증을 마친 후 베드로는 내가 누구이기에 성령의 역사를 막을 수가 있겠느냐?면서,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겸손하게 성령의 변명을 하니 이것이 통해서 그 사람들이 수긍하였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며 나도 그랬으니 내 변명을 잘 듣고 깨닫기를 바란다고 간증했을 때, 그들이 변했고 가고 오는 세대에 이 18절은 이방 선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막히고 막힌 이방인 선교가 바로 베드로 한 사람의 적용으로 둑이 터졌습니다.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신 것처럼 베드로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류가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막힌 담이 뚫려 여러분, 교회, 목장과 나라가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지역감정, 진영논리, 차별금지법도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들교회가 이것을 타파해야 합니다. 부부싸움도 심하게 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서로 절대 당신은 안 변한다는 편견이 있는 가정에 목자님 부부와 평원님이 심방했습니다. 그 심방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결혼한 지 8년이 되었지만, 소통도 안 되고 생각이 달라서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별다른 적용도 하나 없이 서로 안 변한다고 하니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작은 적용을 숙제로 내주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두 가지는 집에서 옷 좀 입고 다니기, 하루에 꼭 몇 시간씩 나갔다 오기였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한 가지는 자신이 힘들어할 때 '힘들지? 응원할게.' 이 한마디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주 큐티 본문에 여호아하스가 아람으로부터 구해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니 구원자를 보내주셨다는 본문이 있었는데, 이 부부에게 말씀 보는 공동체를 통해 온 교회가 달라붙어서 말씀을 전해줌으로 구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적용을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 물어봐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내 잘못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모든 변명이 성령의 변명이 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