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순교]
행 7:51~60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1904년에 발간된 언더우드 부인이 쓴 상투잡이와 보낸 15년을 보면, 조선의 모든 기독교도를 살해하려는 기독교인 살해칙령 소식을 언더우드가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친러가 득세하니 언더우드는 라틴어로 전보문을 써서 에비슨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에비슨은 전보문을 번역해서 알렌 공사에게 알렸고 알렌은 고종을 알현해서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순교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압박과 방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했는데, 순교하려면 압박과 박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성령의 순교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 때문에 합니다.
50절까지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설교하던 스데반이 죽을 작정을 하고 이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예루살렘 성전을 동일시하며 우상시 했던 조상들이 이를 지적하던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너희들도 똑같이 죽였다고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완고하고 교만하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그동안 여러 차례 책망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태생이 지옥 뿌리에서 올라온 교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성령을 거역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성전을 사모하고 살면서 할례를 행하였지만 동시에 몰록우상을 섬기고 신 레판의 별들을 섬겼기에 그 결론으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고, 성전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니 분기탱천해서 핍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이를 갈면 내가 전한 복음이 진짜라는 증거도 됩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스데반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구원 때문에 끝까지 사랑해야 되지만 우리나라, 조상, 부모이기에 무조건 옳다고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아야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쳐다보는 것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께서 왕으로 서셔서 스데반을 영접해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우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55절 한 절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다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가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돼서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그 삼위의 하나님 중에서도 56절에는 인자이신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스데반이 말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 사역으로 무엇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인지 이유를 말하고 가는 것이 성령의 죽음, 순교입니다. 그래야 후손들이 기억합니다.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이신데 인자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간이 되셔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는데 하나님이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자가 그를 섬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지금 하나님 우편을 보니,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나사렛 출신으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거기 그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자기같이 고난을 당하시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서 계시니 내가 갈 곳이 거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봤기 때문에 안심하고 순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나를 돌로 쳐 죽여도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니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셋째. 혈기를 감당합니다.
내가 이렇게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선 것을 보고 기쁘게 이야기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부하는 게 세상과 자연인의 특성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뀌고 회개할 생각을 안 하고 성전의 재산을 지켜야 된다는 이해타산 앞에서 한마음이 되어 스데반 한 사람을 몰아 죽입니다. 사울도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도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때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열매가 없어 보이는 스데반의 죽음 그 자리에 한 사람, 바로 전 세계를 변화시킨 바울 복음의 주인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돌로 침을 당해 죽은 것처럼 믿음의 사람이 이렇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단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인자이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면 돌로 침을 당해도 혈기를 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의 혈기를 끝까지 감당하고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쉼이고 죽는 게 자러 가는 것처럼 편안한 것입니다. 죽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돌로 치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니까 진심으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고 내 영혼을 받아달라고 똑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세의 순교는 혈기 안 내는 것입니다.
개척 때부터 16년간 교회를 나오신 김정란 집사님의 장례식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암 말기로 투병하면서도 마지막 소원은 남편과 자녀구원이었습니다.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이 두 곡을 꼭 장례식에서 불러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장례식에서 그 찬송을 듣고 남편이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내와 다시 만나려면 교회에 가야겠다고 하셨답니다. 살았을 때 그렇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을 죽자마자 들었는데 김 집사님이 하늘이 열린 것을 보고 가셨나 봅니다. 이분이 아내 집사의 기도로 바울 같은 한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서두의 기독교 살인 칙령을 막은 또 하나의 요인은 기도 콘서트였습니다. 당시 미국 북 장로회 해외선교회는 각국에 보내진 선교사들을 위해서 전 미국 북 장로 교회가 기도하는 달을 정했는데, 1900년 10월은 한국 선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조작된 칙령이 발각되어서 학살의 음모가 미연에 방지되었습니다. 성령의 순교도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 해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요즘 코로나19로 힘든 우리도 집에서 직장에서 잘 죽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단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