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랑
창세기 23장 1-3절
인간은 사랑을 할 수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정욕적인 에로스의 사랑, 친구를 위한 필레오의 사랑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다가 거기에서 배신과 아픔을 겪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많은 질고를 겪으면서 참된 사랑을 알아갔습니다. 사라가 남편 순복으로 아름다운 작별을 했기에 아브라함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진심으로 울어 주는 사랑입니다. 부인이 죽으면 겉으로는 울어도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으매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1-2). 사라가 육과 영의 돕는 배필이자 동역자였기에 크게 울며 진심으로 슬퍼합니다. 아브라함이 흘린 눈물은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눈물이 아닌 믿음의 눈물입니다. 성경에서 현숙한 여인 아비가일은 남편이 권세와 재물을 가졌어도 구원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의 죽음에 울지 않았습니다(삼상25장).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했을 때는 경건한 사람들이 크게 울었고(행7장),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5).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죽어도 구원과 상관없는 가족은 진심으로 울어줄 수 없습니다. 부모형제가 아닌 영적 지체만이 나를 위해 울어주며 구원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귀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렇게 울었겠습니까! 남편 순복이 아내의 최고의 선이라면(벧전3:6), 아내 사랑은 남편의 최고의 선입니다. 남편들이 말씀의 지식을 따라 행할 의무가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연약한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영적 생활인 기도가 막히고 생명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벧전3:7).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보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순종보다 힘든 것이 사랑입니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것이 본성이기에 약한 아내는 강한 남편에게 순복할 수 있지만, 강자인 남편이 약자인 아내를 귀히 여기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에게 더욱 말씀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없는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길 수 없습니다. 남편이 말씀의 지식을 알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먼저 아내가 아름다운 순복을 행해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치졸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때리고 바람을 피우고 술 마시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순복을 통해 믿음이 들어가면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잘 일어나게 하는 사랑입니다. 사라가 죽고 60년 넘게 함께 보고 만지던 육신이 사라졌습니다. 이 땅에서 육으로 보고 만날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공포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순복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된 아브라함은 두려움 없이 시체 앞에서 일어났습니다(3).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쏘는 것에 맞지 않고(고전15:55-56) 잠시 후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부활 신앙으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사랑의 결론입니다. 부부가 아름다운 예술을 논하고 꽃을 사다주고,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라가 아내로서 리얼한 삶의 고난 가운데 그대로 살았다는 것이 아름다운 순복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사소한 말도 잘 들어주는 것이 귀히 여기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약한 아내가 순복하는 것보다 강한 자인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천 배, 만 배로 귀히 여기십니다. 연약한 아내를 귀히 여김으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 영혼 구원의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창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