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산의 대결]
왕상 18:16~29
소명 받고 가는 이 땅에서 아무도 이사야의 말을 안 들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아합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듣지 않아 엘리야가 갈멜산 대결을 선포합니다. 결국 이 땅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사역을 위해 지금까지 엘리야를 훈련하셨습니다. 오늘은 엘리야와 바알의 갈멜산 대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괴롭게 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신앙을 이 세상 원수마귀와의 전투로 비유하는데, 이 시기는 바알 숭배가 국교화 되어 있어 여호와 신앙이 사라질 지경이 되었기에, 엘리야는 생명을 내놓고 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앞에 나타났을 때, 아합은 대뜸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합니다. 하나님이 기근을 주신 이유가 아합이 세상을 사랑하고 돈과 번영을 좇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데, 아합은 기근의 원인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기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없다면 축복이 와도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수 없습니다. 고난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축복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불신 결혼과 이혼을 막을 때 그럴만한 사정과 형편이 있다며 왜 다들 나를 괴롭게 하냐고 합니다.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원수 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갈멜산 대결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성도님은 아들 고난이 십 년 이상 계속되는데 회개가 안 되니 마음이 힘들어 교회와 목장에 대해 냉담한 상태라고 합니다. 이분에게 아들 고난은 고통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분이 '아들이 속을 썩이니까 아들도 아내도 밉고 김양재 목사님도 밉습니다.'라고 나눔을 했습니다. 말씀이 안 들어가면 다 밉습니다.
둘째, 850대1의 대결입니다.
엘리야가 힘든 훈련 끝에 드디어 분연히 대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무조건 순종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구원 때문에 목적을 분명히 하고 단호하게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물질적 풍요함을 누리며 잠시 뒤에 망하게 될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대결을 통해 그들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우상은 가짜라고 증거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850대 1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비 마귀에서 난 자라는 말이 맞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데 있는데, 세상은 거짓으로 얼마나 거짓 같지 않게 하는가가 성공의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가 자리 잡는 만큼만 거짓이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거짓을 알게 되니까 우리가 괴로운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말씀대로 살아내면 이단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셋째,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머뭇머뭇하려느냐.는 원어로 두 바위틈 혹은 두 개의 나뭇가지 위에서 절뚝거리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26절에 절뚝거리다가 또 나오는데 뛰놀더라로 변역이 되어 있으니 머뭇거리다와 뛰놀더라가 원어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전국적인 기근의 고난을 겪고 있는 이때, 구원자인 엘리야를 따라야지 대결할 때가 아닌데, 아합왕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진리의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한 분은 큐티하며 복음을 전해도 늘 울 일이 많고 가정에 문제투성인데, 다른 한 분은 남편이 목사님이고 말도 그럴듯하게 한다면, 누가 진짜인지 머뭇머뭇하고 분별이 안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무엇이 진리인 줄 알면서도 자기 삶이 걸린 고백이기 때문에 대답을 못 합니다. 나의 이익이 걸린 문제가 생기면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말씀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먼저 좋은 송아지를 선택하라 했는데, 대결 후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두 송아지가 좋고 나쁘고는 백성들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삶 속에서 말씀이냐 자식이냐 선택하라고 한다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넷째,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바알과의 대결입니다.
엘리야가 좋은 송아지를 골라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되 불을 붙이지 말라고 했던 제안은 바알 선지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입니다. 바알은 참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뛰놀더라는 머뭇거리다와 같은 절뚝거리다와 같은 단어라고 했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바알 선지자들은 뛰놀며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우상을 인격적으로 사랑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애원하며 부르짖습니다.
엘리야는 왜 응답을 안 하시나? 뒷간에 가셨나? 늦잠을 주무시나? 하며 바알을 조롱했습니다. 이것을 구원받지 않은 시각으로 보면 엘리야가 무식해 보이고, 어떻게 저렇게 전도를 할 수 있나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단은 조롱의 대상이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에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28절에 나오는 자해행위는 바알 예배의 정교 의식 중 하나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자기 열심으로 무섭게 굶어가며 큰 소리로 부르고 빌다가 결국 절망하고 낙망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가족의 아내 집사님은 아들이 돈 사고를 쳐도 끝까지 믿어주고 용서하면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꽉 차 있어서 10년 동안 공동체의 권면도 어떤 말로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힘들게 돈 안 갚아주는 적용을 하는데 최근에는 보험사기를 쳤다고 합니다. 이 가정이야말로 갈멜산의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아들이 지금 다 뛰놀다 절뚝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는 자라는 소리를 잘 듣고 850대1의 외로운 싸움을 하며 머뭇거리지 않길 바랍니다. 갈멜산 전투는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바알과 대결이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어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