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파를 주리라]
왕상 11:1~13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보고 복되도다를 부르짖는데 막상 솔로몬은 복되도다의 주인공이 되지를 못합니다. 겉모습이 너무 화려해진 솔로몬이 여호와를 떠나는 것처럼 믿는 우리도 교만하게 복되도다의 주인공 자리를 떠날 수 있습니다. 왜 그리 잘나가는 솔로몬이 여호와를 떠나는지 보겠습니다.
첫째, 풍요가 위기를 가져다줍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기에 스바와 같이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이방 나라들이 다투어서 솔로몬과 관계를 맺고자 많은 보화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여기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노략 당한 백성들을 구조하고 도왔지만, 그 아들 솔로몬은 사치하느라고 백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신명기 17:14-17절에 왕은 말을 두지 말고,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며 은금을 자기를 위해 많이 쌓지 말라고 했는데, 병거 천 사백 대, 마병 만 이천을 두었고, 애굽에서 말을 사서 아람 왕과 헷사람들의 왕에게 되파는 투자가 아닌 투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무시하고 살면 이 땅에서 이렇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길이 참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솔로몬이 한순간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아람의 말을 팔았던 솔로몬은 결국 아람의 병거에 의해서 침략을 당합니다. 드디어 정점에 갔다가 물질적 부유가 솔로몬의 지혜를 삼켜버렸습니다.
둘째, 불신결혼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위기의 배후에 바로의 딸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 결혼하지 말라는 것인데, 솔로몬은 후궁 칠백 명과 첩 삼백 명을 얻었습니다.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고 나라가 부강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아내를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에 능통했지만,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한 남자에게 한 아내만을 허용하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솔로몬이 아내도 한 사람으로 만족 못 하고 무엇이든 최고가 아니면 만족 못 하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나라를 위하고 무역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들인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근본적으로 여자를 좋아한 것 같습니다. 한 사람 사랑하기도 바쁜데 천 여자를 사랑하는 게 그게 사랑일까요? 그야말로 지옥이지요. 솔로몬이 스스로 선택한 바로 그 일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왕국을 무너지게 하고 훗날 바벨론 포로까지 가게 되는 몇백 년 후까지 멸망을 자초한 바로 주범이 되게 하였습니다.
셋째, 불신결혼은 우상숭배로 이어졌습니다.
외국에서 솔로몬 한 남자만 보고 시집을 왔는데 여자가 벌써 천명이나 되다 보니까 차례가 언제 돌아오겠습니까? 다 외로운 것입니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자기 나라 신들을 만들고 산당을 지어서 섬기는 천 명의 여자를 다 헤어려 줄 수 없는 솔로몬은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각 나라와 관계를 잘해야 하기에 그들이 자기 나라 신들을 섬기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정치적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 숭배의 수호자를 해야 함에도, 스스로 우상 종교를 도입했고 산당을 지은 것입니다. 바알, 아세라를 섬기는 부족이나 나라에 따라 다른 이름과 숭배 방법인 아스다롯, 밀곰 등의 우상 숭배가 무섭게 퍼졌습니다. 다윗은 나단선지자도 와서 이야기해주고 그 죄로 분수령 적인 회개를 했지만, 솔로몬은 천명을 얻어 들여도 회개를 안 했기에 우리도 그 죄를 잘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생명은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재물로 여자를 즐기고 하나님의 지혜로 교만해졌고 하나님의 권력으로 백성을 역군 삼아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고,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과 권력이 죄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을 솔로몬이 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훈계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일찍이 두 번이나 나타나셨는데 여호와를 떠나고 명령을 지키지 않고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진노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호와의 진노와 고통이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한 마지막 보호막인 것입니다. 다윗의 고난이나 솔로몬의 번영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고난이 많아야만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고난이 많지 않을 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다윗이 행한 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름길이 말씀 묵상하고 공동체에서 같이 듣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아무리 지질해 보여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평강이 없습니다. 성도는 팔복이 인생의 목적이고 좁은 길 가는 게 목적인데, 솔로몬은 고난 없이 만들어진 재물 때문에 여호와를 떠난 것입니다. 삶의 질은 자기가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대상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믿음만큼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앙은 선택인데 압살롬도 르호보암도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 신앙을 택하지 않고 세상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옥 가는 것은 자기 삶의 결론입니다.
다섯째, 그럼에도 한 지파를 남겨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의 이 방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셨습니다. 솔로몬의 그 약함을 가슴 아파하시면서 한 지파를 남겨두셨습니다. 이 한 지파는 고통입니다. 앞으로 반역해서 나가는 열 지파에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다수인 열 지파를 이기려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고 계속 이 한 지파를 가지고 열 지파를 물리쳐야 하니까 이 고난을 통해서 드디어 여기서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슬픔이고 사랑입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남겨준 한 지파로 인해 힘들어도 그것 때문에 그루터기가 되게 하셔서 예수님이 오게 하십니다. 한 지파를 주시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회개하면서 가는 게 한 지파를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