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단]
왕상2:13~46
부르심 받고, 믿음의 후손으로 힘써 대장부가 되면 나라가 견고해진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 땅의 사단을 분별하고 결단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인생은 되었다 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견고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결단해야 할지 보겠습니다.
첫째, 아도니야의 욕망의 과대망상을 뛰어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는데, 아직도 야망을 버리지 못한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나옵니다. 화평한 목적으로 왔다며 이 왕위는 원래 내 것이었지만,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아우의 것이 되었다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생색을 냅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주제 파악을 못하고, 솔로몬보다 능력 있는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을 수종 들던 아비삭을 단지 수종녀로 보고 자신에게 아비삭을 달라고 합니다. 압살롬처럼 왕의 여자를 얻어 반역을 다시 도모하려는 계략입니다.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면 이렇게 겉모습으로, 직책으로 무시합니다. 천국을 모르면 이 세상이 다인 줄 알고 욕심대로 일을 벌이다가 결국 다 망하는 것입니다.
둘째, 밧세바의 가족에 대한 연민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고 솔로몬 왕에게 나아가 한 가지 작은 일을 구한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구원의 일을 이처럼 시시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밧세바는 솔로몬의 적수인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고 그를 회유하는 것이 자기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내 자녀를 위해 하는 일이 오히려 사단, 원수를 위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간파하고 그를 처형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분별을 잘하려면 혈연과 감정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밧세바의 요청이니 효자인 솔로몬은 결단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밧세바로서도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이 자기의 청을 거절하니까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요청, 나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해도 그것을 나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한 거절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일이고, 아도니야는 사단의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반드시 쳐서 죽여야 합니다. 내 속의 아도니야를 봐야 하고, 이것을 쳐 낼 내 안팎의 브나야 같은 군사를 길러내야 합니다. 날마다 큐티하면서 내 속의 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 속에 브나야가 있으면 내 밖의 브나야도 나를 돕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아비아달의 직분우상주의와 요압의 성전우상주의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1)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충성했던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다윗의 모든 환난을 같이 받은 제사장이었지만, 언약궤를 맡고 있었음에도 결국 아도니야의 반역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물어 제사장의 직분을 파면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합니다. 엘리에게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삼상2:32)이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자녀를 잘못 키우면 이렇게 80년이 넘도록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투명하게 살게 되면 80년이 지나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은 진정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요압이 죽은 이유는 그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는 따랐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압에게 끝까지 신뢰의 대상이 사람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이 쫓겨난 것을 보고 제단으로 도망가 성전 단 뿔을 잡아 회개하는 척했지만, 적용의 동기를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목장에 가도 기복적으로 기술적으로 세상 지혜를 얻기 위해 묻기만 하는 것은 성전우상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성전 자체가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요압이 마지막에 반역자 아도니야를 따른 것은 다윗이 심히 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능력의 아도니야를 택한 것입니다. 또한 요압은 선한 두 사람, 아브넬과 아마사를 다윗의 허락도 없이 죽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신다고 합니다. 내가 무고한 일을 당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다윗 때는 왜 요압을 못 죽였나,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요압을 죽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언제 죽여야 하는가가 관건입니다.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입니다. 다윗은 카리스마가 있고, 리더십이 있는 왕이기 때문에 이런 요압, 아비아달을 두고도 통치할 수 있었지만, 솔로몬은 충성된 브나야, 사독 제사장, 나단 선지자가 신실하게 뒷받침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윗의 때부터 예비 된 조력자가 있었기에 오늘 솔로몬이 성공적으로 공동체의 악을 잘라낼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시므이의 매너리즘을 넘어서야 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다윗을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나,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 안에서만 살라고 명하며 이를 어기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 안에서 살라는 것은 베냐민 지파의 기득권을 버리고 왕의 감시와 통치에 굴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배와 공동체, 말씀 묵상으로 지체들과 교제하면서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회개하지 않고, 그 예루살렘을 벗어나려는 욕망이 안 끊어져서 결국 자기 꾀에 넘어가 처형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경계를 넘으면 안 된다고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확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므이가 머무른 기간이 딱 삼 년입니다. 교회 와서 양육 다 받았는데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것이 매너리즘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이유는 사적인 감정과 이기주의가 합쳐진 것입니다. 기복주의와 성전우상주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가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자꾸 지경 밖으로 나가려는 내 악을 처단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해진다고 약속하시고(왕상2:12), 다윗이 유언하고 가자마자 아도니야 사건이 옵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일이 잘되고, 계획대로 모든 것이 풀리는 것이 견고인 줄 알지만, 성경에서는 견고하지 않은 육의 것들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이 세워진 것을 견고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나를 심판해주시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해 빚을 안게 된 한 직분자의 나눔입니다. 자기 마음과 반대로 하는 것이 적용이라고 하니까, 재촉하는 빚쟁이와 은행직원의 전화를 잘 받고, 주일은 안 빠지는 일을 찾아 기다리고, 세금도 갚겠다고 먼저 찾아갔답니다. 하나님은 돈이 생기면 빚을 갚지 않고 부모님 다 드릴 것 같았던지 돈은 주시지 않았지만, 빚을 탕감해주시는 방법으로 채워주셨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경계 지어 주신 환경이 있습니다. 답답해도 그것이 내 악으로 인해 내가 죽지 않기를 원하셔서 은혜로 허락하신 환경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더욱 견고히 해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