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구원 그 후!
창세기 19장 29-38절
하나님께서 소돔의 멸망에서 롯을 구원하시는데 롯은 소돔에서 지체하며 쉽게 나오지 못했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시는데도 소알로 가겠다고 떼를 써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그 후, 롯의 인생은 어떠했을까요?
여전히 두려운 모습입니다. 롯이 산으로 도망하기가 두렵다고 소알로 갔는데, 소돔의 심판을 보고 나니 소알도 망할 것 같아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때에 맞지 않는 적용으로 산에 올라가더니 거기에서도 두려워서 굴에 거합니다(30). 롯이 떼 부리는 기도를 했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소알에 갔으면 거기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사명입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세상과 인연을 끊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롯이 혼자 거룩하게 산다고 산으로 갔지만, 그것은 죄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죄는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꿔서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내 죄를 자각하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소돔의 멸망을 보고도 롯의 딸들에게는 배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소돔에서 개방된 성을 맛보았기에 소돔의 음란한 방식대로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자고 합니다.(31-32) 자녀를 데리고 굴에 들어간다고 자녀가 거룩해집니까? 인터넷, 휴대폰을 끊어서 거룩해지는 게 아니라 부모가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롯이 평소 술에 만취했기 때문에 딸들이 이런 꾀를 냈을 것입니다. 롯은 딸들의 눕고 일어나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33-35).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나는 그럴 줄 몰랐다’고 하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발뺌하고 싶어도 결국 롯의 삶의 결론으로 악이 행해진 것입니다.
여전히 두려운 모습으로 여전히 깨닫지 못하니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롯의 딸들에게서 나온 모압과 암몬은 우상숭배를 하며 대대로 이스라엘을 적대하고 괴롭혔습니다(36-38). 예수님이 오시는 영적 수치의 계보가 아니라 예수님을 대적하는 육적 수치의 계보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섬김의 복으로 구원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해주십니다(29). 영적 후사인 이삭이 나기 전에,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는 아브라함과 롯의 섬김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담고 있습니다. 영적 후사가 오기 위해 섬김과 대접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의 구원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롯이 천사를 대접함으로 은혜와 인자를 얻었습니다(19). 롯을 구원하시는 징표로 섬김의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자발적인 헌금과 섬김이 구원의 징표가 됩니다. 나에게 섬길 기회를 주시는 것이 나를 생각하사 나의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상한 심령을 가졌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소돔의 심판은 회개를 거절하는 자는 누구나 심판 당할 것을 보여주신 모델입니다. 똑같은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도 않고 듣지도 아니하는 자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는다고 하십니다(마10:14-15). 불완전해 보이는 롯이 구원을 받은 것은 소돔의 악을 보고 고통하며 의로운 심령을 상했기 때문입니다(벧후2:7-8). 무법하고 악한 식구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절대 안 변해’하고 물러선다면 나의 구원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심령을 상한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남은 자 된 것처럼, 바위같이 안 변하는 가족들로 인해 고통하며 의로운 심령을 상하는 내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됩니다.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 창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