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
창세기 19장 1-11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눅16:13).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겉으로 경건해 보이는 그들이 두 주인을 섬겼기에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딤후3:5).
두 주인을 섬기는 인생도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롯이 소돔의 성문에 앉았습니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허무함을 느끼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 일어나서 영접합니다. 소돔의 악함만 보다가 믿음의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서 자기 집에 머물기를 간청합니다(1-3). 무교병을 구워 식탁을 베풀고(5),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과 관계하겠다고 할 때 자신의 딸들을 내어주겠다고 합니다(7-8). 롯이 아브라함에게 신앙 훈련을 받아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진정성이 떨어집니다. 곧 달려가 하나님의 사자들을 영접했던 아브라함과 달리 롯은 그냥 일어나서 영접합니다(1). 아브라함은 지극정성으로 대접하며 권했는데 롯의 권함은 한 절에 그칩니다(2). 하나님이 소돔의 악을 감찰하러 오셨으니 천사들은 거리에서 지내며 소돔을 지켜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롯은 자기 집에 들어오기를 간청하고, 때에 맞지 않는 무교병으로 아니함만 못한 대접을 합니다. 소돔 사람들의 남색을 막겠다고 딸들의 처녀성을 내어주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인생은 악한 세상을 사랑합니다. 롯은 소돔의 악을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성문에서 서성이며 떠나지 못했습니다. 롯이 소돔을 사랑해서 못 떠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극단적인 타락을 보여주십니다. 성적 타락의 절정이 동성애인데 소돔 백성들이 무론노소하고 남색하는 자들입니다(4-5). 성적 욕구 때문에 롯을 해치려 하고, 천사들이 눈을 어둡게 했는데도 쾌락에 집착하며 문을 찾느라고 곤비합니다(9-11).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당시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재판관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소돔을 도와준 아브라함 덕분에 롯이 재판관이 됐습니다. 소돔에 거하는 자(14:12)로, 영원한 소돔 백성이 되어 일류로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롯을 일시적으로 ‘우거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놈이 우리의 법관이 되려한다’고 롯을 배척합니다(9). 롯이 소돔에 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무시했기에 지체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없고 경건의 진정성이 없으면 어떤 옳은 말과 행위도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삶의 결론이 너무 비참하기에 우리는 한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롯을 구해주십니다(11). 내 힘으로는 한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하나님의 훈련과 경계로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있고, 롯은 성문에 앉아 있으니 롯이 더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주인을 섬긴 아브라함은 자손대대로 축복받은 인생이고, 두 주인을 섬긴 롯은 멸망의 성읍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인생입니다. 나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내가 한 주인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을 통한 내 인생의 부흥을 이루어 주십니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창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