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그 사랑
창세기 18장 9-15절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24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의 관문을 지나며 죽은 자와 방불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영적 후사인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 결론을 얻기까지 열국의 어미 사라가 보여주는 태도는 주께서 탄식하실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사라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며, 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셔야 했는지 십자가 그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나와 주님 사이에 막(幕)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 그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방문한 하나님의 사자가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십니다(9). 사라를 통해 영적 후사의 복을 주려고 부르시는데 사라는 아직 장막 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달려 나가지 않고 장막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모르고 가시적인 축복을 구하기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이 생깁니다. 배우자, 자녀가 영적 후사로 세워지는 것보다 눈앞에서 잘 되기만 바라기 때문에 주님께서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희생 없이는 신령한 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이 있으니 때와 기한을 모릅니다. 그동안 반복해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확증하셨어도 사라가 믿지 못하니까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라’고,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강조하십니다(10). 그 말씀을 듣고도 사라는 아직 장막 뒤에 있습니다. 어둠의 장막에 머물러서 밝히 이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의 때와 기한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모르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게 됩니다. 나이가 많고 부부 간의 즐거움도 끊어졌는데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시니 사라가 속으로 비웃습니다(11-12). 17장에 아브라함의 웃음이 겉으로 드러낸 의심이었다면 사라의 웃음은 깊은 체념과 불신을 속으로 숨긴 비웃음이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왔는데, 늙고 노쇠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라를 보면서 남들도 자기 자신도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라의 비웃음을 아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고 아브라함에게 물으시며 ‘이르시되’ 말씀이 들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사라를 양육하십니다(13).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다가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말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데 사라는 ‘내가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15). ‘승인치 않았다’는 것은 반복하고 강조해서 절대 웃지 않았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데도 내 죄를 인정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하고 무섭게 추궁하십니다. 사라를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무섭게 야단도 치시고 끈질기게 양육해가십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십니다. 사라가 하나님을 비웃고 거짓말을 했어도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해주십니다(14). 열국의 어미 사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제한적인 믿음으로 근심하고 비웃는 사라의 모습이 나의 모습입니다. 내 죄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왜 날 사랑하시는가’ 물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도저히 생명을 낳을 수 없는 죽음의 인생이지만,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십자가 그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영적 후사를 낳는 인생으로 죽음의 땅에서도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