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실수
창세기 16장 1-6절
아브람이 창세기 12장에서 자손의 약속을 받고 가나안으로 떠나왔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있어도 없어도 예수 이름으로 죄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기에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하는 것이 있고, 그래서 또 실수를 합니다.
여전히 풀지 못하는 자식 문제 때문에 또 실수합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자식 문제에 여자의 역할, 엄마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녀를 생산치 못하니(1)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자랑할 아들이 없어서 살기 싫고, 자식이 잘나서 교만하고, 자식이 못나서 속상하고, 해결할 수 없는 자식 문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 훈련을 잘 받는 것이 거룩해지는 길인데 사래에게 여종 하갈이 있어서 다른 길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별처럼 많은 영적 후사를 약속하셨어도 여전히 육적 자식에 매여서 또 실수를 합니다.
사래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잉태를 막으셨다고 합니다. 아브람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여종과 동침해서라도 아들을 낳으라고 합니다(2). 살신성인으로 대를 잇는 희생을 한 것 같지만 이것은 하갈을 이용해서 자신이 세움 받으려는 사래의 교만입니다. 자식 문제에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적 방법을 동원하고, 자존적인 교만으로 자타가 속는 헌신을 합니다.
헌신적으로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 아브람도 분별을 못하고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2). 여호와께 묻지 않고 사람의 말을 들어서 또 실수를 합니다. 아브람 속의 풀리지 않는 자녀 문제를 사래를 빙자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아브람의 정욕과 사래의 자존적 교만이 만나 또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때가 가나안에 거한 지 10년 후입니다(3). 10은 완전수입니다. 10년이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서 또 실수합니다. 이때로부터 15년 후에야 자식을 주셨으니 지금 아브람과 사래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헌신과 선교와 봉사보다 찬란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영적 후사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림으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찬란한 믿음입니다.
하갈이 잉태를 해서 잠시 기뻤겠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은 인간관계는 바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갈은 사래를 무시하고, 아브람은 책임을 회피하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결국 하갈이 도망합니다(4-6). 또 실수함으로 인간관계가 망가집니다. 하갈은 잉태해서 아브람의 사랑을 받는다고 사래를 무시합니다. 사래는 자기가 헌신을 했다고, 학대를 정당화시킬 남편의 권세를 업고 하갈을 학대합니다.
가정의 관계가 깨어지고 무시 받는 것이 자신 때문인데도 사래는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책임회피로 또 실수를 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브람은 사래가 좋은 대로 하갈을 학대하라고 책임을 회피합니다(5-6). 책임회피의 뿌리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은 내가 죄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수와 변명과 책임회피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책임지는 한 사람에게 리더십이 주어집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책임지는 한 사람이 있을 때 또 실수하지 않게 됩니다.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에서 책임지는 한 사람이 되어, 또 다른 실수를 막고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