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임]
룻 3:6~13
교사인 어떤 집사님이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라는 권면을 듣고 섭섭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부 못하는 아이와 실력없는 아이를 차별했으며 교회에서도 대단한 분들과 교제하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은 어디에서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사는 학생을, 사장은 사원을, 부모는 자녀를, 목자는 목원을 책임져야 합니다. 진정한 책임자는 책임지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그 책임지는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보면 감사의 선택으로 충성하며 배려하며 안식으로 들어가야 진정한 책임감이 생깁니다. 오늘 책임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책임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히브리어로 ‘헤세드’인 ‘인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헤세드’는 언약관계 안에서 자비를 베풀고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인간의 ‘헤세드’는 서로 상대적인 ‘헤세드’이지만 하나님의 ‘헤세드’는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세상 끝 날까지 이루겠다는 것이 ‘헤세드’입니다. 그런데 바로 룻이 이런 ‘헤세드’의 인애로 책임지는 사랑을 오늘 베풀었습니다. 너의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하다고 합니다. 이런 ‘헤세드’의 지혜를 가지고 발치 이불을 들라는 시어머니의 제안을 ‘헤세드’의 명으로 여기고 책임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룻의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명령을 상황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었고, 하나님의 명령이 사람의 명령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예민하게 듣는 데서 시작이 되고 완성이 되는 책임완수를 한 것입니다. 준비된 자는 타이밍도 잘 맞추는데 때에 맞는 만남과 때에 맞는 대화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인애, ‘헤세드’의 지혜입니다.
두 번째, 책임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잘 믿고 전하려면 발치이불 들고 눕는 것과 같은 수치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는데 말씀의 명령대로 적용할 때 ‘헤세드’의 용기가 생깁니다. 책임을 잘 감당하려면 명령을 잘 들어야 되고 명령을 잘 들으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야 하니 얼마나 고민이 많겠습니까? 믿음으로 행하지만 순간순간 우리는 앞날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나오미가 룻도 신뢰하고 보아스도 신뢰하지만 그 당시의 고정관념은 알 수가 없기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룻을 밤중에 보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유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심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가 많은 것을 보여주십니다. 날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그것 때문에 밤이 새도록 기도할 때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헤세드의 용기입니다.
세 번째, 책임의 목적은 기업 무르기입니다.
룻은 당신의 옷으로 덮어달라고 요구하면서 보아스가 자기와 결혼해야 되는 이유를 고엘, 기업 무르기라고 합니다. ‘고엘’은 룻기의 주제인데 사람은 기업 무르기에 목적이 있을 때에 책임을 지고 용기가 생기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목적일 때 가장 최고의 책임감을 발휘합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기업 무르기, 전도, 영혼구원입니다. 결국 기업 무르기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 적용한 행동이 말씀 묵상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 용기 있게 부끄러움을 드러낸 적용인지 옳고 그름에 의한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적용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책임은 포기가 필요합니다.
기업을 무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될 게 많습니다. 룻은 구원을 위해서 젊은 남자를 포기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결혼자리를 넘기고 룻도 시어머니의 포기하는 그 사랑 때문에 시어머니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나오미도 룻도 보아스도 모두 이타적이기 때문에 다 같이 포기하며 책임지는 사랑을 하니까 책임지는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책임은 절제입니다.
책임지는 사랑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보아스는 그 발치이불을 들고 들어온 룻을 무시하지 않고 귀하게 여깁니다. 책임지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안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보아스가 룻을 안았다면 오늘날의 예수님은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기업 무를 자가 아직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해결이 안된 상태에서 룻을 안았다면 이 결혼은 되지 않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절제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두에 차별을 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던 집사님은 오랫동안 차별 없이 받아주고 섬겨준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차별했던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책임지는 일 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