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서]
창50:15~21
요셉과 형제들이 화해하고 아버지 야곱의 마지막 유언 후에 화려한 장례식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직 해결이 안 되는 용서가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 마지막 주제가 용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고 내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용서는 받아야만 합니다.
왜 받아야만 할까요?
1) 죄책감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오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화해했음에도 아직 죄의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2) 내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의 아버지를 ‘당신의 아버지’라고 표현합니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친아버지인데도 내 아버지가 되지 못하니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남으로 느껴지십니까? 용서받기 어려운 죄책감으로 인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3) 내 고통과 직면하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유다 형님의 적용으로 화해는 했지만, 이제는 다른 형들도 자신이 행한 악을 인정해야 합니다. 악이 주는 고통과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으면 사람 앞에서도 그 과정을 따라서 반드시 고백해야 합니다.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용서의 단계’가 있는데 고통을 소유하는 개념으로 옮겨가라고 합니다. 고통을 획득하고, 인정하고, 이름을 붙이고, 평가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오늘 형들이 악을 행해서 오는 고통을 자신들의 것으로 획득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요셉에게 인정하고, 이 고통을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자기들이 행한 악의 결론이라고 평가하고, 연약하지만 책임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고통이니까 내가 고치겠다고 하는 것이 죄의 고백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지난날의 잘못들을 하나님께 저지른 죄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를 받고자 하니까 반드시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 용서는 해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금세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용서하면 안 됩니다.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요셉과 형들은 둘 다 죄인이고, 피해자입니다. 형들은 아버지한테 차별받은 피해자이고, 요셉은 형들이 팔아먹었으니 피해자입니다. 피해의식과 피해의식이 뭉쳤으니 요셉이 육십 세가 다 될 때까지 이 문제가 안 풀립니다. 선택론을 기뻐하지 아니한 요셉이 이 마지막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형들이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보고, 요셉은 자신을 편애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베냐민을 편애한 것이 형들에게 비참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무릎을 꿇은 형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내 탓임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요셉이 ‘나는 형들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나?’ 라고 합니다. 요셉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셋째, 용서의 종결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고 기억 속의 상처를 지울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용서한다는 것은 또 다른 교만입니다. 인간은 죄만 짓고,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용서는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상대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인격적 한계를 인정하고 당시 주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할 수도 없으므로 오직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예배의 자리에 그 사람을 데려오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인간적으로 위로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이 모두 하나님께로 왔어요. 형들이 나를 해하려 한 것도 하나님은 모두 선으로 바꾸셨죠. 많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요.’ 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기억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로우심이 내 속의 슬픈 생각, 천한 생각들을 물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건이 달라지는 것이 용서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시각이 넓혀지는 것,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자로 가는 그것만이 용서입니다. 강자가 용서의 표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셉이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겠노라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 이렇게 용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를 위해 지금 책임져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고백입니다. 한 집사님은 세 살 때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시고 무허가 산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차별을 겪으며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어 늘 집단의 아웃사이더로 자랐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성령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꼈지만, 이 세상에 안 되는 것이 부모님과의 화해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 환경과 사건으로 ‘나는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우리들교회에 오게 되어 조금씩 말씀이 들리게 되니까 그간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적용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덮어놓았던 원망과 분노가 나타나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아직도 그렇게 부모님을 원망한다면 진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자기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성폭행 당했던 상처가 해결되고 아버지에게 애틋한 마음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에게 남은 것이 또 있더라는 것입니다. 상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자신은 아버지보다 정말 좋은 가장이 되고 싶었는데 죄를 고백해도 또 교만함이 올라오고 아내와 아이의 눈을 통해 계속 자기 죄를 보게 된답니다. 그래도 내가 나쁜 가장임을 인정하고 목장에서 죄 고백을 하고 가니까 좀 쉬워지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해 여러 과정을 거쳐 가게 하십니다. 용서에도 과정이 있습니다. 무조건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날마다 내 죄를 보면서 죄의 고백을 통해 죄가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용서되고 모든 중독도 끊어질 줄 믿습니다.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입니다. 날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연약과 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 자신의 상처 속에서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간곡한 말로 용서받고 용서함으로 모두를 아버지 앞에 인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