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마태복음 27:1~10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지난 중독(여호수아 10:15-28) 설교로 각자의 끊이지 않는 중독을 목 밟으라 하니 목장을 통해 우리의 수많은 중독의 실체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끝내 중독을 목 밟지 못하면 -목장을 통해 나의 중독을 나누지 못하면- 중독이 끊어지지 않아 죽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지도자가 중요하지만, 자살은 정말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 자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살로 이끄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해 뜬 후에만 모일 수 있었는데, 은혜로 시작해야 할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논의를 하며 법을 어깁니다. 우리가 이런 본문을 보며 말씀을 잘 적용하려면 그 어떤 악한 일에도 믿는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 먹고 바람피우며 빚진 사람이 무조건 나쁘다며, 그의 행위로 볼 때 나쁜 사람이니 집안 어른들이 새벽부터 모여 이혼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회의입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구속사를 이루시는 것처럼 문제 많은 그 사람 때문에 온 집안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결박해서 빌라도에게 간 것은 믿는 시댁의 문제를 안 믿는 친정에게 호소하는 꼴입니다. 우리 집의 구원을 위해 그 사람이 악역을 맡았다면 그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야지 그 통로를 잘라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껴안으셨습니다. 내 가족의 죄를 내가 껴안지 않으면, 한 몸인 배우자를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누가합니까? ‘어떻게 그런 놈하고 살아’하며 이혼을 모의하고 죽이는 논의를 하는 목사, 부모, 형제, 배우자가 바로 자살로 이끄는 지도자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도 힘든 일이 닥치면 자살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새벽으로 밤으로 아이들을 학교, 학원으로 태워다주며 무슨 의논을 하십니까? 일류대학에 가는 것이 주님 살리는 일일까요? 유다도 제자들 중에 일류였기에 돈궤를 맡았을 텐데 결국은 주님을 팔았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면 결국 주님을 팔고 죽이는 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 악역을 맡은 사람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을 내쫓고 끊으려 하지 않습니까? 가족의 죄를 껴안지 못하고 구원의 통로를 잘라버려 자녀를 자살의 길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가정도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자살은 공동체가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세상에는 자살할 일이 너무 많지만 목장에서 꺼내어 나누고 가면, 자살의 영, 어둠의 영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둘째, 좋은 지도자 밑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사형을 선고받자,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예수님이 절대 사형 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유다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줄곧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고 말씀하셔도 그 누구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예수님이 끌려가시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집니다. 회개는 안 되고 후회와 가책만 있습니다. 타락한 죄인에게 본래적 의를 상실하고 남은 것이 양심입니다. 회개에 이르지 못한 양심의 가책은 자살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뉘우친 뒤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유다는 돈으로 해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발아래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며 비난한 유다였습니다. 유다의 자살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한 가지는 탐심입니다.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며 멋지게 죄를 고백하는 듯하지만, 여기서 ‘범하였도다’는 부정과거형으로 계속적인 애통이 아닌 ‘옛날에 죄 한 번 지었지’하는 표현입니다. 뉘우침의 원어인 ‘메타 밀로마이’는 회개에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한 돌아온 탕자처럼 죄는 구체적 적용이 포함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유다도 예수님 제자였으나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 장로들과 공모하더니 그들과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사울도, 유다도 너무 똑똑해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죄보다 이 세상에서의 수치를 더 염려함으로 자살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살을 죄로 정립했는데 그 이유는 자살한 그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죄책감을 못이겨 목매어 자살했는데 요6:70-71에 마귀 자식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갔다는 뜻이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반항한 죄입니다. 살인을 해도 죄를 돌이키고 회개하면 천국에 가지만 자살은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유다처럼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정죄하고 미안해하고 상대방을 미워했던 죄책감으로, 상대방을 죽이려했던 복수심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이 자살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합니까? 후회와 뉘우침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죄 문제까지도 내 힘으로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지는 않나요? 욕심에 이끌려 선택하고서 남 탓을 하며 상대방을 미워하고 복수하려 하는지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자살을 해도 상관이 없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양육 받고도, 예수님을 팔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갔습니다. 대제사장임에도 유다의 죄책감과 후회에 너무 무관심 합니다. ‘네가 당하라’합니다.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입니다. 너무 바쁘다고 죽음에 이른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제일 교만한 사람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 최고의 감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유턴입니다. 지금 회개하고 돌아오면 구원해 주십니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투자할수록 기대가 믿음이 되기 때문에, 그 기대를 저버리는 얘기에는 눈과 귀를 닫습니다. 애인의 배신 가능성, 투자금을 날릴 위험성 같은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십 년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자녀에 이르러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식이 큰 문제를 일으켰을 때 가장 당황하는 사람이 부모인 이유입니다. 문제아는 없고 문제부모만 있습니다. ‘아니 무슨 상관이냐‘ 하면서 계속 술 마시고 바람피고 있습니까? 자녀에게 우울증이 올 때, 상관없는 부모는 아닙니까? 목장에서의 자유로운 나눔이 상담이 되어 자살의 아픔에서도 자유하게 되는 것을 우리들교회를 통해 봅니다.
상담할 일이 있습니까?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상담해줄 수 있는 깨어 있는 지체입니까? 죽고 싶다는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말씀을 이루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옳지 않은 핏 값을 성전고에 두는 것이 타락한 일로 벌은 돈을 헌금하고 유다같이 자살하는 것이기에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예수님 판돈이 거룩하지 못함을 스스로 증거한 셈입니다. 유다나 구약의 사울처럼 열심히 살다가 중상을 입은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자살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갑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암으로, 교통사고로, 돈이 없어서, 남편, 자녀, 시어머니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사명이 끝났기에 데려가신 것입니다. 자살해서 지옥 간 죄인이라고 조상을 정죄하며 핑계대지 말고, 말씀을 이루는 믿음의 후손이 나올 것을 믿으며 여러분들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며 걸어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