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말]
야고보서 3장 1-12절
섬기는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말 한마디로 깻박을 치기도 하고, 천 냥 빚을 갚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부드러운 말을 넘어 온전한 말을 해야 합니다. 온전케 된 믿음은 온전한 말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통해서 온전한 말이 무엇인지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말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고삐를 꿰고 재갈을 물림으로 말들은 사람에게 순종하고, 아무리 큰 배라도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합니다. 그러나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 한 마디의 말이 치명적인 상처가 됩니다. 비방은 살인보다 무섭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한 번 일어나지만, 명예훼손은 살인이 계속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한 가운데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 교회의 나눔을 통해서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섬기는 삶 전체가 평가 절하될 수 있습니다. 나는 대화중에 상처를 줍니까?, 아니면 상처 받습니까?, 내가 최근에 상처준 말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생각하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에 상처 준 사람은 사과하며 회개하고, 상처받은 사람은 감당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해달라고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말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은 혀로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수 있습니다. 손으로는 한 사람도 죽이기 어렵지만 말로, 자랑으로 수많은 사람을 속이고 모독하며 죽일 수 있습니다. 자랑은 도덕적, 인격적 연약의 과시입니다. 이해타산으로 교제하는 모임은 자신의 치부는 감추고 자랑하기에 승진이 안 되고, 자녀가 공부를 못하고, 아파트 값이 떨어지면 그 안에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자랑의 배후에 지옥불이 있습니다. 지옥불은 ‘게헨나’로 구약시대에 몰렉에게 자식을 불태워 바친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자식은 ‘나’이기에 자식을 통해 지옥을 가장 많이 경험합니다. 혀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모, 형제, 보기 싫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살인합니다. 생각이 말로 나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마음에 비통함이 있기 때문이고 자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랑합니까? 비판합니까? 어디에서 지옥불을 경험하는 악과 죽이는 독이 있는지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말은 이중성이 있습니다.
교회에선 봉사하고 예배드리면서 집에선 자녀에게 폭력과 폭언을 하는 위선적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욕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내 자녀가 좋은 모델이 되어 자랑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 지옥을 사는 것은 우리의 옳고 그름 때문입니다. 샘 근원이 쓴물인지 오염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명 물은 오염되었어도 변하여 사람을 살립니다. 오염된 물이 깨끗하게 되도록 도와주는 일은 내 옆에 사이코패스가 있는 것처럼 지루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샘 근원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의 수고에 힘입어 깨끗케 될 날이 오게 될 것을 믿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이중적이고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의 이중성을 보며 ‘내가 너무 더럽구나.’라고 고백하면 생명 샘 근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고백이 없이 날마다 죽을 것 같다고 하면 생명 샘 근원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도 회개는 안하고 그 벌이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억울하고 죽을 것 같아 당장 상황 해결만을 바라는 것이 생명근원이 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말에 이중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 내가 가인처럼 회개하지 못하고 억울하여 사건 때문에 죽을 것 같은지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온전한 말은 어떻게 할 수 있나요?
1) 온전한 말을 하려면 우리에게 형제가 있어야 합니다.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이 가득한 우리지만 공동체를 통해 경험하며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복음 전할 제사장인 우리에게 야고보는 많이 선생 되지 말라 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도와주는 것처럼 하지 말고 낮은 입장에 서는 under_stand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혀가 아니라 혀를 이용해 말하는 인간의 마음이 조절 불가능함을 말합니다. 아무것이나 떠벌리고 싶은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선생의 자격입니다.
2) 온전한 언어는 사명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유리그릇처럼 다루어야하기도 하지만 죄에 대해서 단호히 가르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동성애와 낙태는 죄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하나님 백성,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죄를 가르치는 것과 판단하는 것은 다릅니다. 내 속에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이 가득 있다고 쉬지 않고 외치는 것, 나의 부족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언어이자 변화의 지름길입니다. 내게 온전한 말을 가르쳐 줄 공동체가 있습니까? 쓸데없이 남의 말이나 듣고 있냐고 공동체를 회피하면 온전한 말을 배우지 못합니다. 나는 선생 된 자로 낮은 곳에 서서 가르칩니까? 아니면 늘 판단하고 있습니까? 말의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의 부족을 보며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내가 예수 믿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근원이 있는 말입니다. 나를 회개케 한 말이 온전한 말이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게 하는 말이 최고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