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다스릴찌니라
창세기 4장 1-7절
1971년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평범하고 건강한 대학생들을 감옥 세트 안에 집어넣고, 각각 교도관과 죄수의 역할을 맡겨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했습니다. 놀랍게도 죄수복을 입은 학생들은 실제 죄수처럼 위축되었고, 간수복을 입은 학생들은 권위적인 태도로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집단적 광기 때문에 7일로 예정되었던 실험이 5일 만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휴머니즘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악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소원을 가진 100% 죄인일 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자손을 낳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서로를 깊이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아 ‘획득하다, 얻다, 세우다’의 뜻인 가인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와도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고백하게 됐습니다.(1) 그런데 둘째의 이름은 ‘허무, 공허’라는 뜻의 아벨로 지었습니다.(2) 여호와께서 획득하고 얻게 하셨다고 감사하다가도, 달라지지 않은 환경에서 땀 흘려 수고하려니 인생이 허무하고 공허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모로서 예배와 경건의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 교육에 실패하고 자녀끼리 원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심사할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나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인지 아닌지는 세월이 지나 심사의 때가 오면 드러납니다.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스스로 수고해서 얻은 땅의 소산 일부를 제물로 드렸습니다.(3) 자기 열심으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아벨의 예배는 기뻐하며 받으십니다. 아벨은 가장 귀한 양의 첫 새끼, 가장 아름다운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4) 하나님께서 비인격적으로 농산물은 싫어하시고 양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소산 중에 일부를 드린 가인과 달리 아벨은 없는 중에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최선의 것을 드렸기에 열납하십니다. 아벨의 예배는 정성으로 드린 것이고, ‘피 제사’입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인내를 감당하며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본 예배입니다. ‘열납’에는 ‘돕기 위해 둘러보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계산하면서 드리는 예물이 아니라, 없는 중에도 최선의 것을 드리며 남을 돕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둘러보시고 도우십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분노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수고해서 제물을 드렸다고 생각하기에 생색과 화가 납니다.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고, 잘못된 예배의 결과로 분노가 옵니다.(5) 그런 가인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아벨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그를 통해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입니다.(6-7)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 죄의 소원이 있음을 아십니다. 탐심으로 인한 불신결혼의 소원, 이혼의 소원이 있음을 아시고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벌을 받아서는 죄를 다스릴 수 없기에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비결입니다. 아벨처럼 내가 부끄러운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와 십자가의 예물을 드리며, 날마다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는 것이 선행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 창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