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골 2:16-23
사도바울은 ‘천사숭배로 인해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18절)했는데, 이 구절은 ‘천사숭배자들이나 율법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너희를 불리하게 정죄하는 것 때문에 너희 상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상을 빼앗기지 않을까요?
첫째, 그림자와 실체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과정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과정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서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다.’ 하시는 것을 내가 ‘속되다.’ 할 수 없습니다. 정한 것, 부정한 것은 하나님 편에서 생명의 원리로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는데, 이런 그림자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율법은 필요하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의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해야 하지만 본질이 중요하다고 비본질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르치고, 고치시고, 전파하셨지만 자신을 예배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픔을 끌어내고 나누며 애를 씁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 예배가 살아납니다. 본질이 큐티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무작정 큐티를 들이대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을 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질을 잘 보호하기 위해 비본질이 쓰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자는 상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본 것을 의지하여 헛되이 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겸손한 척 하며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합니다. 본 것을 의지해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것이 꾸며낸 겸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믿음을 측정하려 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겸손을 과장합니다. 실체인 그리스도와 본질인 말씀이 빠진 채로 믿으려니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가 나오는 겁니다. ‘비천한 생각’을 뜻하는 ‘겸손’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것도 아니고, 인사 잘하고 공손한 것도 아닙니다. 인생이 어떻게 낮아지지 않고 낮은 것을 생각하며, 인생이 어떻게 낮아지지 않고 자기를 낮추겠습니까? 겸손케 하시려 나를 낮추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삶에서 당한 것 없이 말씀만 본다고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오는 사건에서 말씀으로 적용하는 것이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셋째, 규례에 순종하지 말고, 규례의 뜻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분위기가 아니라 세상의 영적 분위기에 맞춰 살고 싶기에 문자에 매여 순종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노예근성이 있어서 군림하는 목사 밑에서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하라는 대로 하며 복잡하게 생각하길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큐티하며 THINK 해서 자꾸 나의 욕심을 걷어내야 하니 힘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적 규례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상을 빼앗길 일이라고 합니다.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직접 만나는 본질적인 행위이기에 말씀은 절대적 진리이나 말씀의 적용은 시대별, 상황별, 개인별로 달라서 정형화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것을 정형화하게 되면 또 하나의 세상 규례가 될 수 있습니다. 큐티는 공부가 아니라 삶입니다. C.S. 루이스는 음란과 정욕보다 무서운 것이 자기의(righteousness)라고 했습니다. ‘자기의’는 지옥 뿌리에서 올라온 교만이기에 결국 상을 빼앗깁니다. 말씀보다 앞서는 나의 순종은 무엇인지, 본질과 적용의 차이를 아는지, 매 순간 말씀을 영육간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지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드는 자만이 상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교회와 천사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성경이 계시하고 우리의 체험을 그 계시가 객관화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고 신비와 비밀이 있으나 기독교인이 구해야 할 최고의 체험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성도의 연합과 교제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내가 죽어야 연합이 되며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단순히 붙은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킨 것이 ‘연합’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다 같이 아파하며 얽히고설켜 비바람이 몰려와도 흔들리지 않고 자라가는 것이 바로 공동체이고 연합입니다. 나 홀로 절대 자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