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통곡하니라]
마 26:69-75
창립 11주년을 맞이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제1회 우리들교회 목욕탕 목회 세미나 THINK라는 주제로 열게 되었습니다. 'THINK' 는 죄 고백과 간증의 텔링(Telling)으로 룻기 말씀을 통해 오픈하는 것이 능력임을 나누었고, 홀리파잉(Holifying)은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과 인생과 목회의 목적은 행복이 아닌 거룩임을 에스겔 1-48장으로 간증하였고, 이튿날 인터프리팅(Interpreting)은 시편 큐티말씀으로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차례로 읽어가면서 내 인생을 해석하는 것이고 그 결론이 영혼구원임을 선포하시면서 우리들교회의 전 연령의 큐티를 소개했습니다. 공동체와 돌봄의 널싱(Nursing)에서는 사무엘상 말씀을 통해 사울 공동체와 다윗 공동체를 비교하면서 우리들교회가 개척 때부터 환란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이들이 모여서 아둘람 공동체가 되었고 부흥은 힘든 사람을 돕고자 할 때 저절로 오는 부산물임을 증거했습니다. 삼일 째 가정중수라는 결론이 키핑(Keeping)인데 마태복음을 통해서 구속사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구속사의 계보에 오르기 위해서는 회개가 삶의 방식이 되고, 우리들 교회 지체들의 다양한 간증을 통해 우리들 교회의 정수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미나 마지막 날에는 빌라도 앞에서 유대인의 왕임을 담대하게 답하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소에는 침묵하심으로 때를 아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들 교회가 11년간 걸어오면서 조롱과 오해를 받을 때는 침묵하고, 십자가 지는 일에는 확신 있게 할 말을 해 왔던 역사와 우리들 교회의 목회관을 나누며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상 외로 각계각층의 교회가 모여서 칭찬을 받은 세미나였습니다. 그런데 세미나 기간 전 준비할 때 큐티 본문은 에스라 말씀에서 금식하고 기가 막혀 앉았다는 표현이 몇 번이나 나오고,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는 십자가 잘 지는 본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었다 함이 없기에 여전히 심히 통곡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세미나 이틀 째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말씀을 가지고 세미나를 기념하면서 우리들 교회가 갈 길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셨고 이 본문에서도 우셨는데 이렇게 눈물의 영성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주께로 돌이킵니다. 그래서 여전한 방식으로 우리들 교회는 이렇게 심한 통곡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심한 통곡은 무엇 때문인지 마태가 전한 본문으로 오늘 살피려고 합니다. 왜 심한 통곡을 했는가?
첫째,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기에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복음이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 아직 세상성공의 복음이기 때문에 여종을 무시했습니다. 좀 전 까지만 해도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 주를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라고 장담하던 베드로이지만 멀찍이 따라가니까 이렇게 바깥뜰에 있게 되고 부인합니다 정신적, 육적, 영적으로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나 잘났다는 것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무능과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합니까? 멀찍이 바깥뜰에 있다가 부인하는 건 무엇입니까?
두 번째, 베드로는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이제 다 피하고 싶어서 앞문까지 신속히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지 않고 세상 길로 피할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보다 더 비천한 나사렛예수라면서 나사렛 출신을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이란 이름에는 나실인의 뜻이 있는데 나실인은 새싹,구별되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남들이 무시해도 예수 믿는 나는 생명을 가진 새싹이고 하나님께 거룩한 예물로 드려지는 구별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피하지 않고 세상 길로 피해 더욱 힘든 일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이 비천하게 여길 때 베드로처럼 펄펄 뜁니까? 여러분들의 약함을 인정합니까? 나는 세 번이 아니라 수천 번도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죄인임을 고백합니까?
세 번째,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사투리 때문에 갈릴리 출신인지 아닌지 들통이 났는데도 베드로는 자신도 저주하고 예수님도 저주하며 부인을 합니다. 내가 두 주인을 섬기면 세상에서도 예수님에게도 무시당합니다. 인간은 교만해서 내가 망했다, 갈릴리 출신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빨리 인정하면 중간은 갈 텐데 말입니다. 더 무시당하지 말고 당장 시인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네 번째, 심히 통곡을 할 때 생각나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누가복음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그 기가 막힌 배반과 실수에도 쳐다보시는 주님이십니다. 비참하게 일그러진 상황에서 이 주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 최고의 복된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생각나도 안되고 이렇게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돌아보시는 이 주님의 시선을 오늘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죄로 인해 심히 통곡하고 또 다른 사람의 눈물에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는 이 눈물의 영성을 이제 우리들 교회 모든 성도들이 소유하기 바랍니다. 지은 죄를 인정하기 싫어서 세상 속으로 더 들어가지는 않습니까?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나를 돌아보며 쳐다보시는 주님의 시선에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나를 아시고 돌아보시는 이 주님의 시선을 느끼고 나의 이 모든 죄에도 주님이 그 죽으러 가시는 길에 나를 돌이켜서 발걸음을 돌이켜서 쳐다보셨다는 이 일로 인해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통곡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