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청
창세기 45장 16-28절
에서와 야곱의 화해(창33장)가 신자와 불신자의 화해였다면 요셉과 형들의 화해는 신자끼리의 화해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화해를 넘어선 감동의 화해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각자 절대적 가치가 확실하기 때문에 화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신자끼리의 화해이기에 요셉도 모든 것을 내어놓으며 가족들을 초청합니다.
누군가를 초청하려면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소식에 바로와 신복이 기뻐합니다(16). 애굽에서 천히 여기는 히브리인이지만 요셉이 바로에게 신뢰를 받았기에 같이 기뻐하고 식구들을 초청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초청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스티븐 M.R 코비의 말처럼 신뢰를 얻은 만큼 속도가 빨라집니다. 삶에서 끊임없이 신뢰를 쌓을 때 내 가족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일도 빨라질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바로가 애굽 땅의 좋은 것을 내어주며 야곱과 가속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17-20). 그러면서도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지위와 권세와 부를 가질수록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애굽의 수레처럼 가장 좋은 차,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창15:13-14)이 이뤄지는 구속사적 사건이기에 야곱의 아들이 아닌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성자가 아닌 바로의 명에 의해 구속사가 이어지고 요셉은 그대로 순종합니다(21). 강하고 힘든 배우자, 상사에게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우리 가정의 구속사가 이어집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양식과 모든 것을 갖춰 형들을 돌려보내면서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22-24). 양식을 얻으러 왔던 형들이 요셉이 총리된 것도 보고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돌아가는 노중에 ‘누가 요셉을 죽이자고 했느냐’면서 다투지 않겠습니까. 환경에 장사가 없어서 돈이 없으면 화목하다가도 돈과 지위가 생기면 서로 다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온전해서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들에게 다투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요셉 자신이 다툼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베냐민만 너무 사랑해서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챙겨줍니다(22). 내가 온전치 못해도 아직 세상에 좋은 것이 많아도,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실 주님이 계시기에 다른 사람을 초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삶의 이유이기에 초청해야 합니다. 형제들이 신속하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야곱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야곱이 믿지 않으므로 기색하다가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하고, 가서 그를 보리라고 합니다(25-28). 여전히 야곱의 삶의 이유는 라헬과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옛 이름 야곱과 새 이름 이스라엘이 왔다 갔다 하는 온전치 못한 인생입니다. 우리 삶의 이유는 자녀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입니다. 내가 야곱처럼 온전치 못해도 예수님이 내 삶의 이유이기에,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가족과 이웃을 전도하며 구원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창4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