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창42: 25-38
요셉은 형들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그들의 진정성을 검증하고자 작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에 치명적인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바로 “어찌하여” 라는 근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어찌하여” 를 남발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여전히 있습니다. 왜 그런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돈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찌하여” 가 나옵니다(25-29). 돌아가는 길에 형제들은 한 자루를 열다 요셉이 도로 넣어 둔 돈을 발견합니다. 과거의 일을 반성은 했지만, 당사자 요셉에게 구체적이고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28)” 라면서 두려워하지만, 결국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작은 돈, 작은 사건에 정직하지 못하면 진정한 회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하나님’ 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면 하나님의 작전으로 응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형들이 아직도 구구한 변명으로 일관합니다(29-35).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한 일을 고하지만, 자기들에게 유리한대로 왜곡해 설명합니다. 몇 번이고 자신들이 정탐꾼이 아닌 독실한 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자기에 대한 참된 평가는 남이 해 주는 것이고 이러한 중언부언은 독실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너무 두려웠기에 변명조로 일관한 이 보고는 야곱을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요셉 죽인 것을 고백하지 않았기에 진정성이 떨어집니다.
어리석은 충성이 나오게 됩니다(36-37). 야곱이 베냐민 보내는 것을 납득하지 않자 르우벤은 자기 두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내걸지만, 이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어리석은 충성입니다. 서모 빌하와 통간했던 전력 때문에 르우벤은 근본적인 신뢰를 잃었고, 유다가 자부와 통간한 후 “그는 나보다 옳도다” 라고 회개한 것에 반해 르우벤은 회개하지 않았기에 형제들도 르우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편없는 르우벤도 훗날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르우벤의 말이 충동적이고 어리석지만, 레아의 아들과 라헬의 아들로 나뉘던 모계 혈통의 역사가 무너지고 형제 의식이 생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36). “또 빼앗아가고자 하느냐” 이것이 야곱의 주제가입니다. 돈과 권세와 모든 것이 없어져 죽을 것 같은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때인데, 야곱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만 끼고돌며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에만 충실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 야곱의 현주소입니다.
야곱의 이 모습은 신앙고백이 후퇴했기 때문입니다(38). 똑같은 아들들인데 편을 가르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 인생이 슬픕니다. 믿어도, 알아도 안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무작정 옳고 그름으로 손가락질할 수 없음을 봅니다. 숱한 믿음의 역정을 걸어왔음에도 지금 야곱의 신앙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베냐민이 그리스도가 되어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내가 죽을 것 같아도 베냐민을 보내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믿음의 적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셨는데도, 야곱은 이렇게 목적도 없고 방향성도 없이 ‘어찌하여’ 만 부르짖습니다. 참된 자유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의 행동을 다스릴 때 발견됩니다. 공예배와 목장예배로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의 마음에 참 자유함이 생깁니다. 곤고한 일이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이 참 안식이 되어주시고, ‘어찌하여’ 가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저와 우리들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창4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