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에서 발행하여]
창35:16-20
예수 믿으면서도,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중독이 있습니다. 야곱이 자녀들의 수고로 예배를 회복하고 벧엘에서 발행하여 본향을 향해 떠났지만, 야곱에게 아직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의 중독, 라헬 중독이 있습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이 중독을 하나님은 어떻게 끊어 주시는지 봅니다.
벧엘에서 발행해도 가장 슬픈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16-18). 기적같은 임신을 했던 라헬이 길에서 산고를 겪고 출산하게 됩니다(16). 그렇게도 조르고 원하던 아들을 낳게 되었지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합니다(17). 결코 자족하지 못하던 아들 중독 라헬이 죽으면서 아들을 ‘슬픔, 고통, 불행’ 이라는 저주의 이름 베노니라 부릅니다. 모든 것을 가졌던 라헬이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며(마10:28), 믿음의 열두 조상 중 하나가 될 아들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끝까지 미성숙한 모습으로 숨을 거둡니다(18). 십자가가 아닌 자기 연민에 두려워하고 슬퍼 우는 모습입니다.
위로받지 못하는 라헬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애곡하는 라헬을 언급할 때는 영아 학살이 함께 다루어집니다(렘31:15, 마2:18). 죄악이 관영할 때 영아 학살이 등장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자식 우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내 자녀를 영의 자녀로 키우지 않으면 그들이 이 세상의 권세와 명예, 음란과 돈의 포로로 끌려가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이 있어도 ‘자식이 없음으로’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한 이유는, 육신적으로 아무리 잘난 자식이어도 복음으로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깨어서 영적 자녀를 낳고 양육하고 있으면 어떤 사건에서도 위로를 받을 것인데, 전도 한 번 못 해보고, 양육 한번 해보지 못했다면 환난날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마24:19-20).
그러나 야곱은 이 슬픈 일에서 기쁨을 끌어냅니다(18). 슬픔의 아들 ‘베노니’ 를 오른손의 아들, 기쁨의 아들 ‘베냐민’ 으로 즉시 바꾸어 부릅니다. 스스로 아비라 표현하며 라헬의 죽음을 베냐민의 생명으로 바꿔 주심을 깨달았습니다. 해석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바뀌니 고통의 근원을 끊어 주셨습니다(19). 벧엘에서 다시 주신 복을 받고 떠나도 여전한 라헬 중독인 야곱을 보며, 야곱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라헬을 죽이심으로 그 중독을 끊어내십니다. 중독적인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결정을 하고 공동체에 고백하며 격려를 받고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공동체가 회복되고, 가족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에 라헬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중독적 관계에는 분리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관여하는 대신 계속해서 나 자신의 부족을 보는 것이 자존감이 가장 높아지는 비결입니다.
야곱이 수치의 죄패 돌기둥을 세웠습니다(20). 야곱이 세워준 라헬의 묘비는, 내가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내 힘으로 끊을 수 없었던 중독을 하나님이 처리하셨다는 죄와 수치의 기념비입니다. 유모 드보라를 매장하며 통곡했던 야곱이 라헬을 묻으며 울지 않았습니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는 거짓입니다. 우리가 끊지 못하는 중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끊어내시기 전에 여러분들이 공동체 안에서 오픈하고 확인을 받으며 끊어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말씀으로 해석하며, 영적 자녀 잘 낳고 양육함으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끌어내는 저와 우리들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창35: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