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25-주일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8:5-13)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예수님이 부활해서 새 생명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단순한 인간으로 우리를 묶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오직 이기심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너의 이기심과 나의 이기적인 관심이 우연히 일치될 때 우리는 같이 일할 수 있고 일종의 교제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신뢰관계는 형성될 수 없고 나를 이용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너의 이득이 되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고.. 등등 그러므로 나는 너를 의심하면서 살아야 하고 너는 나를 의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인간이 100%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MBC PD수첩에서 문제제기를 하면서 논문 진위 파동이 이제 조작이라고 서울대 조사위원회에서 발표했습니다. 설마설마 했지만 온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거짓 논문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황교수만의 일일까를 생각해보면서 독일의 일간지, 디벨트 지가 줄기세포의 연구의 재앙이 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혹시 황교수가 연구의욕을 잃지 않는다고 해도 누가 거짓말쟁이라고 찍힌 사람과 협력할 것인가 이제 야심있는 연구자들은 과학 전문지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사람과 연구를 함께 하려는 위험을 결코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황교수 생명이 끝난 것처럼 보도를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황우석교수가 이런 연구를 하지 않아야 된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가 다른 각도에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황교수는 끝났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고쳐주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노대통령도, 섀튼 교수도, 부시대통령도 못 고쳐줍니다. 주님은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누군가 황교수를 전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황교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지난 주일에도 그 기도를 했는데 세계적으로 열광을 하는 이 사건이 세계적으로 수치를 받고 어떻게 인간적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생명나무를 건드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결단코 죽음을 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죽음을 보지 않고 지금 수치를 당하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바이처는 정말 세상 끝까지 온 몸을 불사르게 내어 구제하는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기도 자기 자신에 속아 회개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기 의로움에 자기가 속았습니다. 그가 신학자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외치고 죽었습니다. 불교, 치성 드리는 모습, 한량없이 선한 모습들을 보면 속을 것 같습니다.
황우석교수도 수치를 당했기 때문에 12절에 나중에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기 전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황교수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황교수의 문제가 나의 문제,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대학교마다 가면 복사, 논문대행 이것 다 써 있습니다. 우리가 돌을 던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열광하고 한국적으로 열광한 것을 디벨트 지가 한국의 나라도 과학의 영역에 공중누각을 세우고 생명공학의 선구자인 황교수를 영웅으로 만들기에 급급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황교수의 문제는 배후가 거짓이고 성공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는 10년을 앞당긴 거짓을 했다고, 10년을 앞당긴 연구결과를 미리 발표했다고, 빨리 빨리 문화가 빚어낸 이 일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거짓이 있습니다. 우리 집과 우리들 교회는 그런 거짓이 없습니까? 정말 십일조를 계산하면서 정확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데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그냥 감사헌금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수시로 거짓을 행합니다. 시간과 감정과 거짓이 많습니다. 나라에도 이런 거짓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고쳐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끝난 것 같은 마음으로 여기에 오셨다면 내가 고침받기 위해서 어떻게 고쳐야지 될까, 또 어떻게 고쳐주어야 할까, 나는 어떻게 고침을 받고 나의 식구들은 어떻게 고쳐주어야 할까,
1.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5,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말씀을 설교하시고 가난하고 애통하고 좁은 길로 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설교하시고 설교하신대로 사시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셔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제는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행하십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듣고도 맨 처음에 찾아가서 만난 사람은 문둥병자, 이번에는 중풍병자입니다. 백부장, 모든 사람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 거기에다 중풍병자입니다. 문둥병자는 무감각하다면, 중풍병자는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무기력한 여러분들을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람의 찾아감과 주님의 찾아옴이 합쳐집니다. 눅7:2에 보면 똑같은 이 본문에 하인을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늘 들었던 둘로스, 새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둘로스를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를 너무나 무섭게 하고 죽이려고 덤비는 사울을 용서하기도 힘들지만 이런 형편없는 둘로스를 사랑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어떤 분은 차라리 무시하는 무서운 시어머니를 순종하기는 쉬운데 무시받게 하는 시어머니에게 순종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남들이 다 무시해도 될 이 하인을 사랑하는 백부장의 인격은 이스라엘 민족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힘이었습니다. 대부분 자기 자식과 친족을 위해 찾아온 것에 비해 백부장은 부리는 종을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1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로마인 백인부대를 책임맡은 장교였습니다.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지는 이방인 부자이면서 세력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둘로스, 하인의 몹시 괴로워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내 옆의 부인이 죽어가도 따뜻한 말 한 번 해주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해타산이 끝났고 애도 다 낳았고, 이제 용도폐기 처분될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나도 유익이 없고 인간은 이기심으로 묶여진다고 했습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없다고 기대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배우자를 예수믿게 하기 전에는 어떤 것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방인 로마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이 몹시 괴로워한다고 주님께 상태를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자식을 맡겼는데 그 사람에 당신의 아이가 몹시 아프다고 전화로 상태를 알려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내 자식이 기형아이든, 형편없든 간에 맡겼으면 시간 시간 보고해주면 됩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를 안타까워 해주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이뻐할지 모릅니다. 하인이건 종이건 대통령이건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한 영혼에 불과할 뿐인데 우리는 놀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괴로워한다고 그저 보고만 하면 됩니다.
헨리 나우엔도 그랬듯이 내가 치유하려고 하지 말고 보살펴주고 있다가 하나님, 몹시 괴로워하고, 몹시 아프다고 옆에 같이 있어주고 우리 남편이 계속 술을 먹고 괴로워하네요, 여자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네요 라고 주님 앞에 보고만 하면 됩니다. 손은 하나님이 보시는데 손을 여러분이 보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흥신소에 쫓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한 번 손을 보면 끝이 납니다.
그 자리에 가서 같이 있어 주며 괴로와하나이다 하는 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헨리 나우엔과 도널드 맥닐이 긍휼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중에도 가장 심하게 거부당하고 실패한 형태의 인간이 되셨다. 그 분은 인간의 불확실성과 두려움만 아셨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와 고통, 그리고 범죄자로 낙인찍혀서 피비린내 나는 고문과 죽음에 이르는 완전한 추락을 경험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굴욕을 통해서 긍휼로 자기를 비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완전히 몸으로 살아내셨다."고 했습니다.
백부장도 이 긍휼로 자기를 비워 하인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몸으로 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병이 낫기보다도 구원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황교수 사건을 한 쪽에서는 논문 쓸 때 관행이라고, 그가 뭐가 잘 못이냐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 아닙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황교수가 바로처럼 10가지 재앙에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18에서 세계적인 영웅이라도 구원과 상관없다면 피의 전제라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승리는 피의 전제인데 월화수목금금금하는 그런 인간 승리의 세계적인 이름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그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또한 황교수가 그런 연구를 하면 안 된다고 전 세계가 열광하지만 그 이름을 적어도 불렀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긍휼인지 저 사람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들교회가 하도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니까 이제 전부 다 이혼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죽으라고 이혼을 안 하겠다고 하면 판사든 변호사든 집착증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다 잘 못했다고 용서하라고 하면 정말 잘못이 많다고 듣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혼을 안하고 가정을 지키려고 하면 정신이 돌았나 라고 생각한답니다. 나쁜 변호사일수록 악랄하게 조작을 많이 합니다. 황교수 사건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잘못이 없어도 이혼을 당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부인이 이혼소송을 했는데 수 십장의 남편의 비리를 밝혀 놓았는데 결국 남편이 목사라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 말도 안하고 미스 코리아 같은 부인을 아내로 맞은 삶의 결론으로 여기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이혼 소송자체도 정직한 소송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면서 판사와 변호사를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이미 빌라도 법정에서 그 재판에 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죄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혼을 당하면 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까지 했는데 이혼당하면 어떻하나 하면 이혼안하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를 싼 사람을 사서 이혼을 당했다고 하지 말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광로에서 꺼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용서했는데 시편 18에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피할 바위 되시고 피난처 되시고 반석 되신 이유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이 평생 쫓아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그는 나보다 강하다고 했는데 내가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그가 나를 건지셨습니다.
평생 미워하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옷만 베고 힘센 연고는 나를 미워하는 그 마음이 해결될 때 나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사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나를 힘센데서 건져주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나의 대적은 사울이 아니고 사울을 보면서 나보다 높은 사람, 잘난 사람, 강한 사람을 진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고 높여주셔야 되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못 봐주는 사람은 아직도 훈련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황교수가 이번 사건을 통해 분해하지 않고 괴로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가 괴로워한다고 주님깨 고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종도 이렇게 긍휼히 여긴다면 우리가 긍휼히 여기지 못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용질문> 긍휼로 나를 비워 옆에 같이 있어주고 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몹시 괴로워한다고 주님께 간구하겠습니까? 우리도 몸으로 살아내어야 할 긍휼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성경적 가치관이 되어있지 않으면 수시로 그런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좁은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고쳐주시기 위해서,
2. 죽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가겠다 라는 적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내가 너를 고쳐주어야 하겠느냐 라는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테스트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보이고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누가복음의 같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 장로들과 같이 떠나셨는데 멀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 이것을 알고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수고하지 마시라고 얘기합니다. 유대인 장로들에게 회당을 지어줘서 관계도 좋은데 백부장은 겸손합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면 이름도 못 부르는 이 사랑을 백부장이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겉으로는 갈릴리의 한 목수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세아래 계셨고 그 권세는 인생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권세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윗 권세에 순종하셔서 이 땅에 오셨는데 이제 땅의 사람에게 권세를 행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권세를 쓰지 않으신 것처럼 백부장도 그 권세를 종의 보호자로 권세를 쓰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9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
최고의 믿음은 최고의 질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인본주의 사양으로 겸손을 떤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정확하게 근거를 댔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를 하려면 정확하게 하나님을 설득해야 합니다. 정확하지 못하면 금새 감정적으로 가게 됩니다. 윗 권세와 아랫 사람의 자리를 잘 아는 것은 믿음 중의 믿음입니다. 지극히 겸손하기에 가장 똑똑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극한 겸손은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때 나옵니다. 모두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대단한 줄 알 때 그들이 무시하면서도 돈이 많은 로마의 백부장이 한 낱 목수에 불과한 예수님을 이렇게 섬기니까 주 안에서 멸시받음도 주님의 뜻이고 존귀함을 받는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 때문에 멸시받는 것은 주님이 존귀히 여겨주십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여자목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안 해도 될 얘기를 더 하게 되고 쓸데없는 무시를 받을 것이고 그러나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날 것은 여자로 태어나서 목사까지 게 되었기 때문에 여자가 되어서 못한 것이 없고 무시도 열심히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귀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누군가는 한 낱 목수에 불과한 예수님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기관, 대제사장은 무시했지만 알아주는 사람도 있는데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가면 됩니다. 진정한 복음이 있다면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러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항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옳으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인간은 무엇을 해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해놓고 다 상처를 받습니다.
황교수가 좋은 일을 했다고 하겠지만 그는 정확하고 정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겸손에서부터 나옵니다. 나의 정확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황교수가 정확하게 사람을 쓰고 관리했다고 해도 무너졌습니다. 서로가 줄기세포를 배양하고 있다고 믿겠금 서로가 독자적인 일을 하고 총괄은 황교수가 했는데 나의 정확과 나의 열심으로 하면 하나님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줄기세포가 다 있는 줄 알고 서로가 말이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황교수를 사랑하셔서 속죄양을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다 똑같은데 그의 치밀함과 똑똑과 정확으로 하나님께 뿌리를 대지 않는 나의 정확은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내가 정확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정확은 남을 정죄만 하고 무너뜨리게 합니다. 시간 약속을 지켜도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지켜야 하되 잘난 척을 하면서 지키면 안 됩니다.
주님의 정확을 아는 바보처럼 보이는 백부장을 보면서 치우쳤다고, 아부한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부인지 겸손인지 처음에는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증거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황교수에 대한 얘기도 이해 못하고, 죽으라고 가정을 지키겠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서 저는 어쩔 수 없는 개혁자입장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와서 억울하고 기가 막힌 소식들을 저한테 전하기 때문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눈물 흘리다 갔다는 것이 너무나 이해됩니다. 날마다 울 일 밖에 없고 주님 앞에 아무개가 몹시 괴로워한다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면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감당치 못하는 대접을 받고 계십니까,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정확과 정직은 겸손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의 정확과 정직입니까? 이것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적용질문> 가정과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질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의 정확과 정직이 이기심에 있는지, 겸손에 있는지.
3. 주님이 기이히 여길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종을 사랑하며 그의 괴로움을 보며 간구하는 중에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말씀으로만 낫겠다는 이런 냉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혜옥 자매의 9월 마지막 심방 때 아프지 않으면 주님을 더 사랑하고 가겠다고 했을 때 잘 아프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말씀으로 해도 낫겠다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똑똑케 하고 언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혜옥 자매처럼 암과의 전쟁을 이렇게 멋있게 치룬 사람이 있겠습니까? 날마다 말씀이 있고 지체가 있고 교제가 있고 말씀으로 하루하루 암과의 전쟁을 어떻게 치루어 가는지 전 세계에 보여 주었습니다. 끝까지 평강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갔습니다. 이것이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이 밑받침되어있지 않는 믿음은 헛똑똑이고 헛믿음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암과의 전쟁도, 입시 전쟁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황교수의 사건을 시금석으로,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어떤 것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백부장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미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한 마디에 백부장은 우리들교인입니다. 말씀으로 질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암이 낫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시원케 되면 병도 저절로 낫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데려갈 수도 있고 이 세상에 사명이 있으면 그대로 두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기이히 여셨다는 막6:6에 자기 동네에서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는 두 번 나오는 단어인데 이것은 감탄하셨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 너 최고다, 끝내주네, 원더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셨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소리는 있어도 웃으셨다 소리는 없는데 아마도 이 장면에서 웃으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최고로 여겨주시는 사람은 이렇게 하인의 아픔을 보는 사람입니다. 정말 보살피고 있는, 계속되는 치유와 신유의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런 얘기를 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서 이 사람들을 먼저 고쳐주십니다.
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스라엘의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태신앙이 아니고 여러 가지가 부족해도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 믿음을 가끔 봅니다.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도의 믿음입니다. 말씀에 확고한 사람이 천국시민이지 형통하다고 천국시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옥 가보고 나서 후회하면 어떻합니까?
진실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 믿고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동서의 백성 중에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는데 아직도 본 자손만 부르짖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지구상에 누군가 대표로 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들은 영원한 대표로 착각을 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은 교만한 것입니다. 내려오지 않고 낮아지지 않아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갑니다. 황교수도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슬피 울면서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13절: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리라
문둥병은 깨끗함을 받으라가 처방이었고, 중풍병은 믿음대로 될찌어다가 처방입니다. 주님은 병이 나으라고 하지 않았고 깨끗함을 받으라,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셨는데 여러분들의 나의 믿음대로가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다는 것처럼 큐티만 하면 산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내 소원대로 정욕대로 믿음대로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믿는 것이 선해야 합니다. 양심과 지성으로는 천국에 못갑니다.
황교수가 아무리 소원했어도 백성들을 사랑했겠습니까. 백성의 질병을 보고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적어도 허준이라는 드라마는 불쌍하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과수업부터 제대로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정직하게 가느라고 수많은 모함을 받았습니다. 허준에게 야망은 없었습니다.
황교수는 야망이 있고 처음부터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 일이 드러났으면 시인을 했으면 좋겠는데 바꿔치기했다고 지금까지 동거 동락해오던 어린 후배를 고소했습니다. 인생은 어두운데 쫓겨나서 울면서 분해서 이를 가는데 긍휼과 겸손을 모르는 인생은 이렇게 이를 갑니다. 긍휼한 인생은 처음부터 내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를 갑니다. 천국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미 지옥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탄절에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힘든 인생에 오셔서 내가 가서 고쳐주시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굴욕을 통해서 긍휼로 자기를 비워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완전히 몸으로 살아내셨다고 했습니다. 굴욕을 안 당해본 사람은 참으로 남의 인생을 공감하기가 힘듭니다. 굴욕당하는 것은 남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집안이 망해서 공부하고 피아노만 쳐도 장한데 초등학생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대학교 가서도 돈이 없어서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 수업을 빠질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치사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지나보면서 모범생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나 목적이 있고 돈하고 연결이 되었습니다. 장학금을 탈 뿐 아니라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생활비를 내어놓아야 할 학창 시절, 여전히 얼굴은 부티나고 누구도 힘들다고 생각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교양이 없는 삶을 제가 살았습니다. 돈 천원에 벌벌 떨고 교회 가서 반주해주면서 월급을 생각하며 갈 때마다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100% 사람을 믿고 순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어린 나이에 이해타산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굴욕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았습니다. 공부 웬만큼하고 수업도 가끔 알맞게 빼먹고 편하고 수더분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인생인지 아십니까? 그런 애들이 매력있고 멋있습니다. 치사스럽게 일등을 하는 아이들과는 놀지를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굴욕을 통해서 긍휼로 자기를 비웠다고 했는데 나의 굴욕을 통해서 긍휼로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치사스런 마음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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