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녔지만 유교적 관습과 예절이 엄격한 대가족문화에서 자라며 어른에게 no못하고 사람들에게 거절못하는 착한 아이로 자랐고 가족간 들어온 중매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그때 제일 힘들었고 인생이 끝나는줄 알고 있었을때 막내동생 친구 어머니의 인도로 우리들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속은 사람이 잘못이란 말씀이 해석이 되지 않았지만 김양재 목사님 간증 테이프를 하루 종일 듣고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책을 읽고 여자목장에 들어갔고 나누어 주시는 사건과 품어주심으로 회복되어지고, 교회 집사님 소개로 만난 남편의 우리들 교회 와주겠단 약속으로 결혼했지만 목장과 나눔을 싫어하는 남편과의 신혼초 갈등으로 우울하고 힘들어 자기연민이 깊었지만 예배와 공동체 매여가다보니 육적후사인 첫 아이를 주셨고 아이 양육의 행복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남편의 급작스런 두번의 외국 주재원 발령으로 아이도 저도 언어도 준비못한채 가서 적응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남편과 하나되지 못하고 아이 다리 골절과 저도 손목 인대, 목허리 디스크, 무릎등 문제가 생기는 외롭고 고난의 시간을 말씀을 들으며 한국의 목장과 지체들께 기도부탁을 하고 처방을 받으며 살아냈습니다
귀국후 이제 힘든 시간이 좀 지났구나 생각했는데 지방과 서울로 이사를 하며 남편과 돈과 이사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아이도 두번의 전학으로 아빠와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상담도 받고 2년 반째 계속 다리를 다치며 학교 생활이 힘들고 친구 관계도 소원해지고 편두통까지 생겨 광야의 시간을 지나며 내 열심, 인본주의의 저를 직면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시는 과정 중에 부모학교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오정원 집사님
일하셨던 부모님 아래 1남2녀중 막내로 나름 사랑 받으며 자라다가 13살 때 집에서 나를 돌보아주던 보모 같던 언니와 갑자기 이별하면서 상처를 받았고 청소년기 아빠의 부도로 잦은 이사와 전학을 하며 방황했었습니다. 그 후 비교적 행복했던 20대를 보내다 28살 결혼을 앞두고 투병 중이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결혼 후 잦은 다툼으로 우울과 무기력이 왔고 둘째 출산 후 돌 즈음 큰 아이의 뇌종양 판정후 항암 기간을 거치며 부부 불화가 심해져 위기였을 때 시부모님 권유로 우리들교회에 오게 되었고 아이의 질병 고난이 해석되었습니다. 교회에 온 이후 아이의 뇌종양 진행이 멈췄다는 소견을 들었고 여전히 갈등은 있지만 낮목장과 부부목장에 붙어가며 가는 중입니다. 큰아이의 사춘기를 앞두고 양육에 대한 고민이 있고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때때로 중재하기 어려워 부모학교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희정D 집사님
1남4녀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할머니의 기도로 엄마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기도하시는 엄마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청소년 때 수련회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대학 졸업후 취직하며 무늬만 신자였습니다.
20대초반 아빠의 위암으로 수술하셨고 28세 불신 결혼했고 믿지 않는 남편이었기에 교회는 더 가기 힘들었습니다. 옆집 언니의 소개로 첫아이가 2살때 우리들교회 등록했습니다. 둘째 낳고 목장에 안 나가고 예배만 드렸는데 친정 엄마의 조현증이라는 해달별이 떨어지는 사건이 왔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 속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아빠가 위암일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친정엄마를 위해 기도해달라며 목장에 찾아가 다시 예배 드리며 일대일양육으로 엄마 사건이 나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라는 것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 후 셋째, 넷째 출산을 했고. 믿음 없는 남편과 함께 아들넷 양육하고 있습니다. 청소년기가 된 첫째, 둘째가 조금씩 반항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법 알고 싶어 지원했습니다

황경화 집사님
가난과 부모님의 다툼이 싫어 항상 서울을 동경했고 디자인을 배우겠다며 서울에 있는 언니의 신혼집에 함께 살며 언니가 매장을 오픈한 날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일을 도와야 했고, 그렇게 10년을 넘게 언니의 과도한 업무와 무시에 제 마음에는 상처가 쌓여 있었습니다. 30대 초반에 내 사업장을 오픈 했고 사업장이 잘되니 날 시기하는 언니를 보며 힘들었고, 일만하며 외롭게 사는 제 인생이 허무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무렵 남편을 만나 신결혼을 했지만 부재 중인 남편과 일과 육아로 잦은 다툼에 우울증이 왔습니다. 이렇게 살다간 내가 죽겠구나 하는 우울감에 여자 목장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친정 엄마의 폐암사건에 유교적이던 엄마가 목장 식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며 마지막 유언이 '우리가족들 모두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였고, 저의 사명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4째를 출산하며 그나마 축소했던 사업장마저 접으며 일중독이었던 저를 끌어내어 주셨고, 지금은 거처도 가평 시골로 옮기며 육아만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으로 제 발을 묶어주셨습니다. 일은 쉬웠는데 육아는 제 열심으로는 안되기에 이렇게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강은주 집사님
쌍둥이로 부지런한 기질을 타고나서 10개월도 걸었습니다. 그러나 부실한 영양 상태로 그 뒤로 다리가 0자로 휘기 시작하여서 중학교때 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중학교 때 휴학하고 다리 수술을 1년 동안 2번을 받으면서 우울함과 수술의 통증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리곤 공부로 인정을 받으니 서서히 살만하다고 여겼으나, 원하던 의대약대 입시에서 실패하는 불수능으로 인생의 빈 배를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할 수있는건 공부밖에 없었기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급격히 세상으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이후 믿고 의지하던 직장상사와의 갈등,수치와 조롱, 팀원들의 수고로 직장을 그만두는 인생바닥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퇴사 후 전업주부로 육아를 하면서 류마티즘으로 손목 힘줄과 인대가 파열되는 사건으로 손까지 수술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다리와 왼손 모두 수술을 받은 것이, 세상으로 휩쓸려가지 않도록 저를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깨달아 졌습니다. 작년에는 양육교사도 수료하고 올 해 처음 부목자로 섬기면서 영육간에 평안을 누리지만 요즘에는 서서히 매너리즘에 빠져있습니다.
하여, 이런 제 삶을 뒤돌아보고 두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면서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간증이 있기 위해서 부모학교를 신청했습니다.

이가야 집사
저는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딸을 바라던 차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하기 전까지 저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생각에 젖어 살았었습니다. 부모님은 엄마가 교회에 다니는 문제로, 돈 문제로 자주 다투시긴 했지만, 비교적 큰 문제없이 자랐습니다. 9살 때 부유한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상대적인 열등감이 형성되었고, 지금까지도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대학생활을 하면서부터 제 환경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학을 하면서는 제 지적 능력에 대한 자만심도 생겨났습니다. 유학 첫 해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관여하신다는 것을 체험했으나, 기복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꽤 이른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서는 곧 전임교수가 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실패를 하던 중, 중매로 남편을 만나서 결혼이라도 빨리 하자는 마음으로 35세에 불신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편과 시댁에 대한 열등감으로 무시와 조롱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딸과 아들을 바로 낳은 후에도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저와 남편의 성향으로 서로가 힘들었고, 결국 결혼 6년차에 시부모님께 대드는 사건이 발생했고 남편과 별거를 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먼저 우리들교회를 다니면서 저도 2016년부터 함께 다니기 시작했고, 남편은 성품으로 3년을 교회에서 시키는대로 양육도 받고 부부목장도 빠짐없이 참석하다가 저의 말실수를 빌미로 지금까지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수준이 낮은 저이기에 하나님께서 18번째 시도 끝에 기독교 전통이 강한 학교의 전임교수로 임용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드러나면서 딸아이가 2학년때부터 1년 반동안 불안과 강박증세로 놀이치료를 받았었고, 그 즈음에 부모학교를 이수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8월에 3학년인 아들이 소아우울증 판정을 받고 약까지 먹으며 놀이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목사님께서 예배시간에 부모학교를 여러 번 이수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자꾸 남편 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제 죄만 보며 가족의 구원을 위해 섬길 수 있는 날을 소망하며 신청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