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차치환
저는 37세 (84년 생)이고, 5살 짜리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아들은 엄마와 애착이 강한 편인 반면, 저에게는 아빠 싫어한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아빠로서 아들에게 좋은 양육자가 되고 싶어 부모학교를 신청했습니다.
저의 삶선 그래프는,
(출생) 귀한 장손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5세) 엄마와 아빠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이 무렵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하여 결국 이복동생을 낳고 두집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아무것도 모른채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15세) 축구를 좋아하고 성적이 양호해서 반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IMF가 터지고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전까진 집에 대형 수족관이 있을 정도로 유복한 편이었으나, 이후로 채권자들에게 쫓겨 지하 빌라로 이사를 수차례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어머니와 누님 둘과 함께 저희 가족은 똘똘 뭉쳤습니다.
(20세) 아버지의 부도로 학원비와 급식비를 내기 어려운 형편에서 학업에 몰두했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도움을 주는 선생님들이 계셔서,
그 분들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고교 시절 EBS 장학퀴즈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최고의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25세) 대학 입학하고 나서, 아버지도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나오셨으나 여전히 두집 사림을 유지했습니다. 저는 공부만 하느라 놀지 못했던 청소년 시절을
보상받는 듯, 자유 분방한 2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아리 여자 후배를 따라 우리들 교회를 나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형제들의 간증이
저를 위로 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30세) 대학 병원의 외과 레지던트로서 고된 수련을 받았습니다. 내 능력으로 감당이 안 되는 중환자들이 많아서 신앙 생활을 붙잡았던 것 같습니다.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기는 어려웠으나, 청년부에 적을 두고 종종 목장에 출석하며 큐티를 놓지 않았습니다.
(35세) 군의관 시절, 파주에 있는 최전방 GOP에서 근무하였는데 매우 춥고 힘들었습니다. 사병 만큼은 아니겠지만, 간부에게도 최전방은 큰 고난입니다.
그러던 중 아내를 교회에서 만나 신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소위 돌싱 이었는데, 저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자라 온 환경이 유복하고 억압하는 부모 아래서
성장했습니다. 결혼 후 명절 갈등 등으로 몇차례 아내가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허니문 베이비로 바로 아들을 갖게 되었고, 출산의 기쁨이 컸습니다.
둘 째를 간절히 원했으나, 이후 2번이나 자연 유산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37세) 작년에 아버지께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말년의 아버지는 혼자 사시는 독거 노인의 모습이었고,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평소에 폐가 안 좋으셨는데, 코로나 유행 때문에 외출을 못하게 되니 우울증에 시달리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우울증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남기신 마지막 말은 자랑스러운 아들, 너희들에게 내가 폐만 끼치는 것 같다. 진료실에 있는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였습니다.
목장 공동체를 통해 말씀으로 위로 받고 해석받고 있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미운 아버지 였지만, 아버지께 잘 못 해 드린 것들이 많이 생각이 납니다.
1조 김영산

8살 아들을 어떻게 잘 키워야 할지 막막해 하는 와이프의 권유로 부모학교 과정을 같이 듣게 되었습니다
어릴적 기억은 6살때 부터 생각나네요
술을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 하시는 아버지의 경제적 어려움이 곧 저희가족의 어려움이 되었고
낮에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어두컴컴한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9살때부터 저희 어머니께서 직장을 다니시면서 저희집 형편도 점차 좋아졌습니다
중학교 3년동안 나름 공부도 잘하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있어 나름 행복했던 시간 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란 강원도 강릉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어머니의 자존심과 남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지역 1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천재 수재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낙오되어
엄청나게 힘들고 괴로운 고등학교 3년을 보냈습니다
20살, 대학에 진학하고 처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마음에 정말 실컷 놀았던 1년 이었던것 같습니다
21살에 군대를 갔고, 자격증이나 주특기가 없었고 저를 도와줄 줄이나 백그라운드가 없었기에
2년여의 군생활은 정말 죽었구나라고 훈련소 생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지금도 생각이 되는데, 훈련소에서 영어 리스닝 100문제 시험을 치르고 통과되어
미8군 의정부에서 카투사로 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매주 2박3일 외박이 가능했고 훈련도 거의 없는 시챗말로 널널한 군생활을 행복하게 마쳤습니다
24살에 복학을 했고 대학 뒷바라지를 전부 해 주실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장학금을 타려고 노력했고
조금이라도 경제적 보탬을 드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습니다
가장 슬펐던 기억은 친구들 모두 술파티를 벌이며 2002 월드컵 중계를 볼때, 저는 학교 경비실에서
조그마한 TV로 중계를 보면서... 내 인생도 참 우울하구나 생각 했었습니다
26-27살에 중국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고, 교환 학생 가기 전 우연치않게 기도원 집회를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말 뜨겁게 예수님을 만났던것 같습니다. 그 동안은 정말 뜨뜨 미지근한 모태신앙 이었구요....
그 1년 동안은 돈 걱정없이 학업의 큰 걱정없이,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 토요일 성가대 연습 및 봉사
주일예배 다니면서 은혜도 많이 받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29살에 중국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고, 제 인생에서 이렇게 돈을 벌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시 어린 저에게 과분한 월급이 주어졌고, 회사를 그만두는 그날까지도 물질 걱정 없이 살았던것 같습니다
35살에 결혼을 하고 행복한 1년의 신혼생활을 보내던 중, 20대때 다쳤던 발목의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지는
발목 관절염을 앓고, 수술까지 하게 됩니다. 수술 후 몇개월의 고통은 지금 생각해도 참 힘들었습니다
37살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주 기쁘지는 않았던것이 내가 과연 좋은 아빠가 될수 있을까 정말 잘 키울수 있을까
두려움도 한편으로 컸던것 같습니다.
42살에 스트레스를 못 견디고 와이프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설득에 설득을 하여 퇴사를 합니다.
높은 연봉도 우울감과 스트레스는 제게 보상이 되지 못하더군요
43살에 베트남 호치민에 와서 작지만 저의 사업체를 운영하며, 중국에 있을때 느끼지 못했던 삶의 여유와
믿음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에 계속 있었으면 돈만 쫓고 살았을텐데 , 여기에 와서 삶을 돌아볼 시간도 생겼고 그 동안 소홀했던
아들에 대한 양육 고민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1조 류재만


1조 석창현
1조 박선익

1조 박선익 <삶선 그래프>
1977년 지방도시에서 태어날때 문제가 있어 그당시 귀했다는 인큐베이터에서 한동안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주 울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사업이 안좋아지거나 망하는 시기와 맞물려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습니다.
그러다 모태신앙이지만 중학교에 들어가 믿음이 생겼고 중3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제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정치에 입문하신 아버지 덕택에 집안에 경제적 위기가 계속 이어졌고와원하던 대학에 떨어져 집 근처 지방국립대에 들어갔을때은 인생이 허무해 보여 2학년1학기에 군대에 갔습니다.
군대에서의 삶은 힘들었지만 꿈을 가지고 서원 기도하는 가운데 전역 후 곧바로 원하던 서울예술대에 입학하게 되어 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해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집안은 망해가고 제 인생도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식물인간인 아버지를 6개월 간병하다 도망치듯 학교로 올라와 졸업하고는 영화일을 하다 만난 아내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후 해외촬영을 갔다가 거기서 외도를 하고 너무나 마음에 찔림이 있어 귀국하자마자 아내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 이후의 삶은 매일 아내에게 정죄당하고 용서만을 강요당하는 지옥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가 감독으로 준비하던 작품이 무산되고 저도 더이상 버틸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혼을 준비할 2008년 가을 아내가 먼저 지인의 권유로 우리들교회에 나갔고 3주뒤 아내의 권유로 우리들교회에 나와 지금까지 붙어만 가고 있습니다.
8월16일에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을 훈계한다고 집 밖으로 쫓아냈다가 주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사건을 통해 ADHD인 아들을 좀 더 이해해보고자 부모학교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