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 우리들부모학교 제 1강
10조 나눔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적인 고찰을 그래프로 표현해봅니다.
이 점과 선이 하나님을 만나 해석이 되면서 바뀌어지길 기도합니다.
조장님
4녀1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들인 줄 알고 났는데, 딸이었고 중학교 치마교복을 입어보기 전까지 여자다운 옷을 못 입어봤 다. 많은 자매 속에서 스스로 비교하며 열등감 속에서 자랐다. 여자지만 꾸며진 남자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유년시절이 그렇게 슬프지 않았던 것은 시골 자연 속에서 자라면서 많은 힐링을 받은 것 같다.
행복
농부의 자녀로 돈이 없어 대학을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나의 열등감이 치유되는 듯한 연애도 했고, 26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큰 애를 낳았다. 20대를 행복하게 보냈던 것 같다.
불행
큰 아이 세 살 때 목사님이셨던 시아버님에게 조울증이 왔고, 여자가 생겼고, 어머님은 우리집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우리와 살고 계신다. 그간 아버님의 조울증이 세 차례나 더 있었고, 어머니와의 이혼전쟁에서 우리 가정이 고스란히 고통을 함께 받았다.
고부갈등이 너무 심해 우리들공동체에 왔다.
지금은 어머니와 층도 나뉘고, 내 의가 깨지는 수많은 사건을 겪은 후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 사고가 깊은 남편은 범신론적으로 여러 책을 탐닉했고, 최근에는 불교에 관심이 깊어졌다.
사랑에는 분함이 없다고 하는데 남편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보며 분함이 있었다. 그래도 말씀을 듣고 가기에 나를 위해 남편이 수고한다는 것이 인정된다.
김미경N
불행
폭행과 폭언이 난무하는 알코올중독 아버지와 가정사를 비밀로 은폐한 완벽주의 엄마 밑에서 가치관의 부재와 낮은 자존감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왜 이런 아버지?’,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의 고통과 아픔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청소년 시절 상처뿐인 가정사와 엄마의 집착을 밴드부에 들며 음악으로 해소하였고, 대학에 가서 유아교육, 기독교 공부를 전공하였다.
20대 때 어린이집 원장이 되어 출세했다지만 나의 교육적 철학을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다기 보다는 정치적·사교적 대인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고, 알코올중독 아버지께서 신학을 하시고 강도사를 하실 정도였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행복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결핍을 남편으로부터 채우려했기에 가난하지만 성실한 믿는 형제와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물질에 대한 탐욕과 혈기가 드러나며 파혼 당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 (행복) 지금의 남편을 만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짐작하게 된다.
내가 돈이 있다보니 결혼 당시 남편은 수험생이었다. 첫 째 기찬이가 태어남과 비슷하게 남편도 시험에 합격하였다.
작년 5월 우리들공동체에 오게 됐다. 아이들을 요셉처럼 키우려고 했는데 예수를 빙자한 내 욕심임을 보게 되면서 평범하게 키우고 있는 중이다.
김 진
외가는 모두 교회를 다녔고, 어렸을 때부터 집 앞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께서 엄격하셔서 일탈을 생각할 수 없는 10대를 보냈다.
불행 이른 결혼생활과 남편의 사업이 망하는 사건으로 많이 힘들었다.
행복 생활이 안정될 때 즈음 7년 만에 큰 아이를 갖게 됐고 지금까지 평탄하게 살고 있다.
힘든 시기때 아이를 주셨다면 더욱 힘들었을 텐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 불임에서 아이를 주셨음이 더욱 감사하다.
전유미
평탄하게 살았다.
불행 딸 둘 출산 후 여러 가지로 힘들다.
0 그래서 우리들공동체에 왔다. 앞으로 곡선이 제로점 위에서만 있을 것 같다.
이세나
불행 두, 세살 때 외갓집으로 보내져서 엄마와의 애착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집으로 와서 남동생 두 명을 보고 많이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를 왔고 재수를 했지만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다.
결혼 후 큰 아이가 10개월 때 퇴사를 했다.
행복 지금은 안정된 듯 보이나, 부모와 아이의 초기 애착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나의 빈자리로 인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결핍이 대물림 된 것은 아닌지 근심이 된다.
유치원 엄마의 전도로 우리들공동체 온지 1개월 정도 됐다.
김수연
불행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며 엄마, 아빠, 할머니댁을 전전하며 살았고 ‘버림받았다’는 우울이 컸다.
그래도 평범하게 지내려했고, 대학시절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즐겁다고 여기는 순간조차 ‘나는 인생을 즐길 수 없는 사람이야!’ 하며 우울했다.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며 기도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부모에게 버림당함과 같은 거절과 좌절을 느꼈다.
미취학 큰 애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내가 널 안 버렸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 임신 4개월인데 ‘내가 두 아이를 다 망쳐놓겠구나.’
2007년 스물다섯 살에 이른 결혼을 했고, 2009년 우리들공동체에 오게 됐지만,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나일 것만 같다.
부모학교에서 가만히 앉아 강의만 들을 줄 알았는데 관계가 안 되고 부정적인 나는 <아이스 브레이킹> 같은 시간이 불편하다.
김현미
불행 ‘나는 안 태어나는 것이 좋을 뻔 했다.’ 어린 시절은 우울 그 자체였다. 부모님은 최고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아빠는 회사에서, 엄마는 야쿠르트아줌마, 파출부 등 열심히 돈을 벌어 학원비를 대주셨다. 부재중인 부모님을 대신해 여섯 살 위인 오빠가 그 역할을 했고, 어린 오빠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쉬운 방법은 폭력이었다. 삶의 목적, 공부의 목적은 ‘집 탈출하기’였다.
서울로 대학을 왔고 할 것은 악하고 음란한 것 뿐이었다.
행복 아빠 소천 후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로 ‘가족은 구원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구원의 일등공신은 가족’을 보며 오빠를 죽여달라는 기도부터 내 속의 미움, 이기심, 질투 등 지금까지의 인생이 해석되었다.
불행 육아서대로 큰 애를 키웠지만, 자녀가 둘이 되니 눌러왔던 내 것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행복 복직 후 정체성의 혼란과 스트레스로 우리들공동체로 오게 됐고, 나에게 눌렸던 큰 애가 많이 아프다는 것, 내가 성인ADHD 임도 알게 됐다. 공동체에 와서 수지맞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