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한창 '하나만 낳아 잘기르자' 운동 하던 시대에 셋째로 태어나서 우리집엔 애가 너무 많은 느낌이었다. 아들을 기다리셨던 친할머니는 딸이라 실망하시고 내가 잘못을 하면 '안낳으려다가 나은애'라고 부르시며 혼내셨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고 죽다 살아났다는 말씀을 지금까지도 많이 하시는데, 내 탄생이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아왔던거 같다. 어린시절 나는 그냥 굴러다니면서 잘먹고 잘자고 컸다고 한다.
5살때 어머니께서 건강도 안좋으시고, 애셋 케어 하기도 힘드셔서 나만 할머니집으로 보내셨는데, 그 때 외롭고 허전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고, 무슨 이유에선지 할머니께 맞았던 기억도 있다. 상가주택 3층이었던 할머니집 계단에 올라가다가 샌달 끈이 엉켜 걸려넘어서 이마가 많이 다쳤는데 그때 엄마아빠 집으로 컴백했다.
똘똘하고 심부름 잘하던 이미지의 막내로 포지셔닝하며 무난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초등학교 3학년때 '리'에서 '시'로 이사오면서, 약간 도시생활의 부적응기를 거쳤쳤다. 중학교 1학년때 노처녀 미술시간 선생님께 전교생이 다 알도록 선생님께 많이 혼났던 기억이 있는데, 이유는 잘 생각이 안나고 고집을 피워서 선생님을 약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대학진학과 사회생활의 허들도 겨우겨우 넘으면서 무난한 인생의 때를 보내다가, 출산 후 남편의 강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약간 우울감을 느꼈고, 얼마전 남편의 바람사건으로 이를 해석하고자 흘러 흘러 우리들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