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페스티벌★★★
*10조 양정임*

저는 딸 둘을 출산한 이후로 강남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부족함 없이 교육시키겠다는 목표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분양계획을 위해 준비하던 중 친정 부모님의 제안으로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친정과 합가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고 제 뜻대로 잘 흘러간다는 자만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너무도 힘든 시간을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시는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에 좋아하던 일을 관두고 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부지런한 친정엄마한테 맞추느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9첩 반상 아침을 차리고, 출근하시는 친정아버지 도시락 싸드리고, 밤 10시 넘어 퇴근하시는 아버지 술안주를 만드는 일이 너무도 힘에 부쳤습니다. 그러면서 남편한테 능력 없는 시댁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 거라며 짜증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큰딸의 학교 등교 거부까지 있었습니다.
입학한 큰아이는 1학기 내내 학교 입구에서부터 온몸으로 저항하며 거부했습니다. 달래도 보고 협박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거부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받는 것을 유독 싫어하는 저는 매일 아침 학교 앞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로 주목받는 점이 싫었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큰딸이 너무도 미웠습니다. 매일매일 전쟁 같은 아침을 맞이하게 되자 저는 아이 에게 손찌검을 하게 됐고 두 번, 세 번이 되면서 어느 순간 습관처럼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아이한테 우악스러워지는 저를 바라보며 속상해하시는 엄마에게 오히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엄마라고 퍼부었습니다. 엄마가 합가를 제안하지만 않았어도 남편한테 퍼붓지 않았을 것이고, 딸한테 그러는 것도 엄마가 날 엄하게 키웠기 때문에 대물림 된 거라며 상처 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계획했던 분양이 되고,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면서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오는 듯 했지만, 아이는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 자신감 없이 늘 불안해하며 위축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자신감이 생길 거라는 생각으로 저학년 밖에 안 된 아이를 새벽부터 다그쳐가며 공부를 시켰고, 아이는 늘 야단맞고 기가 죽은 채로 등교를 해야만 했습니다.
부모교육을 받는 7주간 훌륭한 강의와 따뜻한 나눔으로 큰 깨달음도 받았지만 무엇보다 저에겐 참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권위적인 엄마 밑에서 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지쳤을까 라는 생각에 미안함이 너무 컸습니다. 나 또한 부족함 투성이면서 어린 아이한테 완벽함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었나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I massage를 계속 적용하며 아이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아이들에게 버거운 칭찬이 아닌 격려의 칭찬을 하려고 당유부(당신도 유능한 부모가 될 수 있다) 책을 보며 남편과 같이 연습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강의였던 청소년 구하기 프로젝트를 통해 제 청소년기를 바라보며, 나만 상처받고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음 알았고 세 남매를 키우면서 엄마도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많이 속상하고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와 화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44주년 맞이한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엄마 아빠 딸로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도 난생처음 해봤습니다. 8주간의 교육으로 하루아침에 개과천선되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하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서 훗날 내 아이로부터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듣는 게 저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바램입니다.
*12조 김민정*

저는 서른한 살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습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장녀로서 일하며 야간대학교를 나오고, 동생 장학금도 보태주고 늘 스스로 해결하고 부모 도움 없이 혼자 잘해 낸 것 마냥 잘난척, 착한 척을 해왔습니다. 고등학생 때 만난 남자와 정욕, 쾌락, 사랑에 눈이 멀어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8년 연애 끝에 임신하게 되어 결혼했습니다. 좋으신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부족함 없이 잘해주셨고 새 생명이 태어나 기쁨이 넘쳤습니다. 젊은 선남선녀가 만나 안정적인 결혼생활 유지하며 세상적으로 자랑하며 자식 우상으로 예쁜 옷으로 치장하며 교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둘째로 태어난 아들은 항문폐쇄증, 좌측 뇌실확장증, 얼굴 비대칭, 왼쪽 눈 수정체 없고, 왼쪽 귀 청력 안 들리고, 왼쪽 다리가 짧고, 왼쪽 뇌에 물이 차는 것으로 인해 전신의 왼쪽 반이 기형이었고, 오른쪽마저도 약했습니다. 저는 무너지고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런 아이를 주셨습니까! 제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모태신앙으로 교회 한 번 안 빠지고 잘 다니고 예수님 믿었는데 이렇게 힘든 고난을 주십니까! 한가지 기형도 아닌 너무 많은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이 아이는 앞도 못 보고, 귀도 듣지 못해 제가 손과 발이 되어 도와주며 살아야 하는데 저는 감당 못 합니다. 하나님이 데려갈 아이라면 지금 데려가 주세요!라며 아이를 포기하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매일같이 울며 퉁퉁 부어 눈을 뜨지 못했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금식과 수술을 견디고 1cc 모유를 먹으며 버티고 견뎌내고 살았습니다.
그때 아이가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느껴 너무 미안했고 제 죄를 인정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4번의 수술로 항문이 생겼고, 발달이 느려 재활치료를 다니며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저를 한방에 무너져 낮아지게 하였고 불행한 삶으로 지냈습니다. 그때 아시는 집사님이 병문안 오셔서 큐티 말씀을 전해주셔서 우리들 교회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은 산후조리 내내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고 계속 큐티 책을 전해주셔서 제 사건이 해석 되었고, 혼전임신과 한 번의 낙태를 회개했고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셔서 이렇게 붙드시고 저를 쓰시려고 시온이를 보내주시고 저희 가정을 구원 시키기 위해 저를 훈련 시키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시온이를 키우며 놀랍게 다 감당해 내었고, 주님은 시온이의 오른쪽 눈을 밝혀 앞을 보게 하시고, 말을 알아듣게 귀를 열어 주시고, 보청기 착용으로 더 잘 들리게 해 주셨고, 대변을 볼 수 있는 항문을 만들어 주셨고, 한쪽 다리가 짧아 깔창을 넣어 맞춤 신발로 다리 길이를 같게 하여 걸을 수 있고 뛰어다닐 수 있게 하셨고, 뇌의 물은 더이상 차지 않고 멈추게 해 주셔서 활발한 아이로 자라고 있습니다. 아직도 앞날이 멀고, 왼쪽 눈 각막이식 대기 중에 있는데 시온이의 삶이 어떻게 될지 주님만이 아시지만 교만하던 제가 겸손하고 낮아지는 고난이 축복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 후 건강한 셋째도 주셨는데, 세 아이 육아가 너무 힘들었고 남편 사업이 잘되지 않는 고난으로 우리들교회 수요예배를 몇 번 나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모학교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는데, 전도하신 집사님의 권유로 신청을 하게 되었고, 돈도 못 버는데 아이 양육을 위해 같이 듣자고 남편도 같이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사람들과의 소통하는 것을 싫어해 한번 듣고는 나오지 않아 서운한 마음뿐이었는데, 강의를 들으며 저의 부족함이 찔리도록 보였고 이기주의에 명령적인 엄마였음을 회개하고 아이들에게 강의 듣고 온 날만큼은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부모학교에서 만난 저희 조원들과 조장님은 모두 한마음 한 공동체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조장님은 저를 안타까워하시며 교회등록과 목장을 권유하셔서 이번 주일 등록해서 목장도 배정받았지만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겠고, 아이들 양육과 상처가 많은 시부모님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는 이 교회로 옮기고 싶기도 하고, 제 마음에는 많은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 부분을 목장 나가며 기도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부모학교를 통해서 아이들 양육에 이론적으로 많이 배웠으나 적용하는 삶을 살기까지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험한 세상에서 세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르게 키우고 싶고 주님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고 싶습니다.
스스로는 게으름의 핑계가 생기고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려 할 때 목장 도움받아 살아나고, 이제는 행복이 아닌 거룩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모학교를 마치게 되어 아쉽고 많은 도움이 되어 감사합니다.
*5조 석진국*
저는 아버지가 하시던 개척교회를 3년 전에 이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교회 사택에 사시고, 저와 아내는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해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교역자 시절에 바빴고, 육아에 전담했던 아내와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가까이 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사역 시절에 서운했던 일들과 산후 우울증, 임신으로 결혼 3년 차에 서로의 차이를 강하게 느끼게 되어 다툼이 오갔고, 오로지 붙잡을 일이 장모님이 다니시는 우리들교회의 큐티책으로 저녁에 같이 큐티하는 게 둘의 돌파구였습니다. 그런 찰나에 목회자 세미나 후 부부목장을 소개받아 2017년 말에 부부목장 탐방으로 들어가 올해까지 탐방으로 3년 차가 되고 있습니다. 부부목장에서 한병렬 목자님의 부모학교를 추천받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제일 먼저 세 자녀를 낳으며 기를 때 모든 자녀교육을 아내에게만 일임하려던 저의 이기적인 모습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첫 시간에 삶의 그래프를 통해서 어릴 적 통제 받았던 목회자의 자녀로서 삶을 보며 내가 나도 모르게 부모님과 같은 자녀를 향한 통제를 하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세 자녀들의 특별한 행동들에 대해 애착이 뭔가 잘못 형성되었던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큰아이는 밖에서는 조용한 반면 집에서만 자신의 불편함을 짜증 내는 울음으로, 둘째는 애정이 결핍되어 5살이 되어서도 손가락을 빠는 행동으로, 셋째는 자기의 행동을 누군가가 억지로 하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막무가내로 소리 지르는 행위로, 세 자녀의 불안정한 애착 관계와 상황에 맞는 행동과 놀이를 해주지 못했던 아버지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놀이치료 선생님을 통해 상담 중 둘째 아이가 가족 그림을 그리던 중에 그림에서 자신이 배제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아 저도 모르게 씩씩하게 자라는 둘째 아이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저의 행동들이 떠오르며 회개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5남매 가운데 막내로 자란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통제 받았던 환경 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질서가 우선시 되어 힘든 나의 내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생존하기 위한 질서에만 치우쳤기에 누군가에게 저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질서, 규칙만 강조하는 저의 모습을 저의 자녀에게도 강조하고 5살이지만 10살 아이 이상으로 대해 왔던 저의 행동들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8주간 들은 것들을 다 적용하고 행동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부모학교 때 들은 귀한 양육의 은혜들을 자녀들에게 잘 적용하는 제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17조 신현종*

딸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로 10여 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퇴직금을 다 가져가고 1주일에 3만원을 주는 남편 밑에서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딸 1학년 때 부모학교를 권유받았는데 등록할 돈도, 시간도 없어 미루고 있었습니다. 딸이 작년부터 희귀병으로 못 걷고 입 퇴원을 반복하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는데 1학기 시작 한지 한 달 만에 독감에 걸려서 타미플루를 먹고 귀신이 보인다며 하루종일 발작하고, 자해와 심한 우울증으로 5개월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우울증약을 먹고 2학기부터 학교에 겨우 다니게 돼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피부 자외선실험 알바를 해서 8만원을 마련해 부모학교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모학교 등록한 지 일주일 만에 1년 넘게 안 팔리던 집이 팔렸지만, 딸을 교회 데리고 다니지 못하게 하던 남편은 딸을 소년부 큐티 캠프에 데려간 것에 화가 나 '너와 같이 이사 가지 않겠다 내쫓아 버리겠다' 며 걷잡을 수 없는 폭언과 협박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달 말일이 이사 예정인데 이사 갈 집을 구하지 못한 채 남편과 갈등만 하다가 목장의 권면으로 남편에게 화평의 말로 낮아지는 적용을 했지만 다 소용없다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남편에게 화를 내고 뛰쳐나가 집 근처 호수로 갔는데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가슴에 말뚝을 박은 것처럼 숨을 쉴 수 없게 되면서 남편과 결혼 전에 주일을 범하며 수치심도 없이 음란을 행했던 것이 생각났고, 이 모든 것이 남편의 사랑과 세상성공을 우상 삼고 육신의 정욕으로 불신 결혼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제 삶의 결론임이 깨달아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고 이사도 못 가게 된 상황에서 토요일 파주 친정집에 갔다가 아빠를 무서워하는 딸을 설득시켜서 주일예배 왔는데 소년부예배 때 목사님이 바울 사도처럼 감옥에서 평화롭게 큐티하고 싶은 사람 있냐고 하는데 딸이 손을 번쩍 들었고 목사님이 너무 감동했다고 기도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지쳐서 자고 있는데 딸이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엄마! 아빠가 교회 가도 된데!' 했습니다. 아빠가 '엄마랑 교회 갔다 왔지? 그렇게 거짓말하면서 교회 갈 거냐?'고 물었는데 딸이 '거짓말해서라도 교회 가는 게 너무 좋고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면 교회에 가게 해달라'고 용기를 내서 울면서 얘기했더니 교회 다니는 걸 허락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심한 부모의 다툼과 분열을 보고 자라서 앉은뱅이처럼 영 육 간에 일어날 힘이 없었던 딸아이가 소년부 목사님과 공동체의 기도와 격려로 일어나 걷게 되었고 기적처럼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목장예배 중 집을 계약했으니 이삿짐 센터 알아보라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고, 그날 밤 두 달 만에 합방도 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큰 사건에서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을 텐데 부모학교와 목장과 예배의 자리에 붙어만 있었더니 딸의 구원이 이루어져 너무나 감사하고 영원히 부를 나의 간증과 찬양을 삼아 전하겠습니다.
*18조 김현주F*

생각보다 짧다고 느낀 부모학교 8주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직 부모가 되어 보지 못했기에 아이를 낳아 길러보지 않은 제 수준 낮음으로 이 자리에 서서 무슨 간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부모학교 13기를 신청하며 큰 기대는 없었고 임신 중이라 그저 좋은 태교가 될거란 생각에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방법을 얻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한 주씩 강의를 들으며 제 어린 시절이 먼저 생각났고 그 상처들을 하나씩 다시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술을 드시고 화가 나시면 집안 물건을 부시고 칼을 드셨던 무서운 아빠에게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청소년기는 겉으로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하고 사춘기가 없는 듯이 지나갔습니다. 여리고 소녀 같은 엄마에게서도 안정된 애착과 일관성을 느낄 수 없었기에 엄마는 나를 보호해줄 사람이 아닌 내가 아빠로부터 지켜야 할 대상이라 생각했으니 더욱 아빠에 대한 증오심을 품은 채 자랐습니다. 어떤 지적도 당하지 않으려 그 시절 친구들처럼 연예인이 좋아서 따라다니거나 게임도 하지 않았고 공부는 어느 정도 하면서 학교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아무도 저의 이중생활을 몰랐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남자를 끊임없이 만났고 고등학생 때는 야간자율학습이 10시에 끝나면 독서실에서 사복을 갈아입고 술을 먹으며 광란의 밤을 보낸후 새벽 2시에 독서실 차를 타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으로 집에 들어가는 연기를 했습니다. 아직도 부모님은 그 사실을 모르시고 사춘기도 없이 부모 속 안 썩이는 착한 딸이었다고 기억하십니다. 당시 이것을 소리 없는 복수라 여기며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착 강의, 사춘기 강의, 그리고 나의 이고그램 그래프를 듣고 보면서 나와 부모님과의 애착 형성에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부모님의 언행 소통방식이 역시 조부모님 소통방식의 대물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비판적인 CP 자아인 아버지와 치우친 헌신의 NP 자아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현실적인 A 자아가 높아져 목장에서는 취조하는 기자 같은 목자라는 소리를 듣고 사랑은 NP로 치우치게 표현하기에 남편에게는 질리는 집착녀 라는 소리를 들었던 제가 곧 태어날 아이에게 어떠한 양육을 할지는 너무나 뻔했습니다.
제 딸이 훗날 저처럼 부모를 속이며 방황한다고 해도 저는 할 말없는 부모이지만 8주 동안 배운 대로 불안함으로 아이를 찍어 누르지 않고 나의 소유가 아니기에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청지기 역할을 하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실전은 이론과 많이 다르다고 하시는데 부모학교를 시기마다 세 네 번은 더 들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되기 전 자식으로서 상처를 먼저 해석할 수 있는 정말 유익한 부모학교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