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조

가난한집 1남4녀 막내로 태어나 정서적케어를 못받고 힘든삶을 사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어른아이처럼 자랐다.
초3학년쯤 가정경제가 피자 시작된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내가 결혼하고 오빠가 사고로 죽자 아버지의 춤바람이 끊어졌다.
20대 간호사로 대학병원근무하며 누리며 살던때, 엄마가 소개시켜준 선본사람과 잠깐교제했을때 행복했고 종교가 달라헤어졌다.
서른에 한번 헤어졌다 다시만난 남편과
사랑과 신뢰없이 취집개념으로 결혼했지만 불행했다.아버지 폭력에 노출된 시모에 대한 연민이 남다른 남편은 예단비를 더 달라는 시모의 전화에 화가나 하는 나를 이해못하고 시모편만들며 결혼 한달만에 2주에 한번꼴로 싸우는 부부가 되었다.
청년부때 친했던 언니소개로 우리들교회알게되고 정착해말씀들으며
우리들교회온지 7년즈음 질서와 관계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사람을 직업과 외모로 차별하는 내죄를 보니 시댁과 남편에대한 미움의 옥에서 풀려놨다.
남편과 불화한 시간이 오래되어 상처받은 중3딸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중1아들은 초1때 경계성adhd진단받았고 나도 우울증 치료를 받고있다. 남편도 ad와 가끔 공황증세가 있는데 약에 적응 못해 치료중단상태이다. 막내가 7세로 제일건강하다.
둘째아들이 막내에게 시기질투하고 ad기질로 관계의 어려움,여러가지 일을 흘리고 다니고 자기일을 못해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 엄마인데 이번 부모학교를 계기로 유능한 부모로 거듭나길 바란다.
강은주

2녀중 막내로 어린시절 부유하지 않았지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컸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때 엄마가 가출을 하셨다. 언니는 수련회가고 없었던 시간이었는데 엄마생각에는 아이 혼자만 데리고 있으면 아빠가 덜 힘들겠지하고 가출한 것이다. 그때 낮에는 친구들과 있으니 잘 놀았지만 밤이되면 엄마가 생각나서 울었다. 주변 어른들은 내가 낮에 잘 지낸다고 엄마가 없는데 잘 논다고 한말이 아직도 너무 힘들다.
초등학교부터 공부도 못해서 주눅이 들고 우울한 성격이었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잦은 다툼으로 아빠가 칼부림하는 사건이 너무 힘들었다.
20대초 대학에 가면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내 바닥이었던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25살에 직장도 학벌도 돈도 믿음도 없다고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이 원망이 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밝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29,30살 연애와 결혼이 최고 절정으로 너무 좋았고 그때 우리들교회에 오게 되었다.
둘째 임신한 기간에 남편이 제대로 돈을 벌어오지 못하여서 물질고난으로 힘들었다.
남편도 직장을 찾고 셋째도 나으면서 점점 좋았는데 2년전 두아이의 adhd라는 판명이 나면서 힘든시간을 보내왔고 지금은 공동체에 잘 묶여서 많은 도움을 받으면 관계도 조금씩 회복이 되고 아이들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김지은

저는 79년생이고 김포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초4(여)초2(남)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16년 정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방치했던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서 부모학교를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때에 아버지의 외도와 도박등으로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살다가 중학교때에 엄마가 유부남인 새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오시다가 대학교 3학년때에 새아버지가 이혼을 하시고 살림을 합치게 되었습니다. 새아버지는 군인장교출신으로 권위적이고 말이 안통했지만 어머니가 원하는 경제적인 안정을 주셨고 두분은 서로 사이가 좋으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중학교때에 성추행도 일삼으시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되셨지만 본인들끼리만 용서빌고 용서하고 저에게는 그냥 넘어가고 계속 사셨습니다.
그 쯤 다니던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총무로있던 신학생 남자친구를 만나서 주말에는 데이트를 못하는 것이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아 핍박하다가 교회가 궁금해서 제발로 동창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 교회에 다니면서 그 교회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존재와 그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듣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 우연히 태어나 운이 없는 인생이라 여기며 아무 목적없이 살던 가치관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하길 원했고 그래서 점수에 맞춰갔던 경찰행정학과가 아닌 디자이너가 되기위해서 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디자이너가 되기위해 많은 회사에서 소모되듯 열정페이로 일하다가 처음으로 제대로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회사에서 남편을 만나 사내결혼을 하고 8년동안 그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내 열심으로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포로 이사오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공동체가 없어서 저를 만나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남편에게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개척교회에서 4년동안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목사님보다 사모님의 파워가 더 쎈 교회였고 그런 사모님이 저의 영적인 어머니라 여기며 교회와 카페를 함께 하던 그 교회에 카페스텝으로도 일하고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교회에 정말 열심으로 섬겼습니다. 오죽하면 사모님의 친동생이 성도로 있음에도 다들 제가 사모님의 동생으로 알 정도로... 사모님과 연락이 안되면 다들 저에게 전화가 올 정도로 친밀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년 전의 사건을 빌미로 교회를 나가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곳에서 맺어진 성도들과...심지어 제가 전도하여 정착한 성도들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사모님의 주도로 다 끊겼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목사님의 책이나 설교는 접하고 있엇기에 문득생각이 나서 김양재 목사님께 메일을 보냈고 목사님께서 메일로 우리들교회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날 부터 저희는 이곳에 붙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교회에서 남편이 나를 외롭게 했다고 저의 죄패를 합리화시켰던 죄에 대해서 진짜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저의 옳고 그름과 기복적인 신앙 혈기등을 보게 하셨습니다.
내 열심으로 살고 내 생각이 옳다고 가정에서 심판자로 살아온것으로 아이들을 방치하고 세월을 허비한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제 역할 제 자리는 엄마와 아내의 자리인것을 말씀으로 알게 하여 주셔서 부모학교를 통해서 믿음의 본을 보이며 가고 싶은 마음으로 부모학교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손현숙

7살 때 시골 친할머니에 보내져서 생활했다. 중학생 고모,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좋은 기억도 있지만 할머니가 무서웠다. 할머니가 무서워 다른 친척할머니 집에 피해간적도 있고 도시락도 잘 안싸줘서 말랐다고 하더라. 어릴적 버려진 것 같은 기억이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다시올라와서 8살에 다시 학교에 올라와서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가게 되었어 주일학교를 통해서 사랑받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11살에 죽음을 생각을 하고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육료를 매번 불려나가면서 가난을 알게 되었다. 사춘기와 함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돌아보니 감정의 기복은 있지만 바닥으로 가지 않는 것은 주일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회생활이 즐겁고 행복감을 주었다.
입시 실패와 돈을 벌면서 재수를 해야하는 것이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22살에 아버지가 갑자기 소천을 하여서 힘든 시기였다. 엄마도 중학교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기복의 모습이셨다. 아버지의 소천으로 교회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였지만 엄마 말씀 기도만 부르짓는 것이 오히려 힘들었다. 원가정이 힘들어서 혼자서 해결하려는 것이 있었다.
집을 떠나고 싶어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관계성을 할수 있는 사람이 의문이었는데 기독교 복지와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감이라고 품었다. 호주에 가서도 교회에 계속 가면서 아프리카 선교의 꿈도 가지면서 젊은 시절의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졸업후 바로 복지관 상담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31살에 결혼을 하면서 시어머니과 같이 살게 되었다. 남편과 사별후에 혼자 아이들을 키우면서 누가 나를 위협한다고 망상속에서 살았다. 내가 사회복지를 전공했기에 어머님을 받아줄수 있다고 착각했는데 공황이 오는 것을 느꼈다. 저녁에 퇴근을 하면서 집앞에 가면 숨이 안쉬어져서 집앞교회에서 20-30분을 숨을 쉬고 집으로 들어갔다. 결혼 6개월 뒤부터 아이를 안가진다고 별별말을 많이 하셔서 분가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분가와 출산까지 너무 좋았는데 전쟁이 되었다.
그래서 36세에 바닥을 쳤다. 남편은 그때부터 사업을 한다고 골프연습장, 자동차 수출사업, 회로수출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수입이 불안정하였다. 이런 일로 내가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남편은 도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부의 생각의 차가 컸기에 싸우면 피하고 단절을 하였다. 우리들교회에 오기 전까지 그랬다. 아이가 부모의 불안이 있어서 불리불안이 있어서 어릴적에 저와 떨어지기 힘들어하고 떨어지기까지 오랜시간을 보냈다. 가정의 불화가 다 제 책임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저의 돌파구로 미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친정엄마가 미국에 살고 계셨기에 미국가려고 워크비자를 다 받아논 상태에서 10년동안 알고 지내는 부동산 사장님이 우리들교회로 어떻게 옮기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생각을 했고 목회 상담이나 가정 상담을 하려 생각했기에 목장에 가고싶은 욕심이 생겨서 사심으로 우리들교회에 오게 되었다. 목장에 오면서 울기만 하였다. 제가 이상만 쫓고 이상주의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목장에서 처음 못됐다고 이기적이다라는 소리를 처음 들어 힘들었다. 소화가 안되서 미치겠는데 각종 예배에 오면서도 그분은 피하면서 다녔다. 6개월 방문을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책 내용이 마음으로 다가와 현대로 사는 이야기를 들려져서 교회 옮기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다. 나는 내가 큐티를 열심히 할 수 있을 거야 생각이 들었데 딸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딸을 위해서 말씀이 있는 곳으로 옮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계기가 없으면 내생각 내판단 내결정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교회를 옮기고 말씀을 듣고 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그런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악함을 선함으로 바꿔주신 것에 감사했다. 우리들교회 옮기면서 남편도 오게 되었고 한달에 한두번 나가지만 그렇게 간지 3년이 되었다. 부부목장에 3년차가 되면서 각방에서 합방을 하게 되었다. 어른들간의 사적인 내용으로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래서 고독과 외로움을 느꼈는데 우리들교회에 오면서 외로움을 못느끼는 것 같다. 믿음의 경주를 해가고 나는 할 수 없는데 앞에서 보여주시는 분들을 통해 갈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송연정
초등학교5학년 남동생2학년때 부모님이혼으로 군인인아버지 밑에서 남동생과 자랐습니다.
저는 아버지 성향을 닮아 겉으론 얌전해 보이지만 속 안은 혈기와 분노가 있습니다.반대로 남동생은 마음도 여고 착하고 순종적인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웃음도 많고 착해서 친구들한테 늘 당하기만 하고 꼬집히고 맞고다녀서 제가 엄마역할을 어렸을 때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그러나 저도 그 착한 남동생을 무시하고 때리던 친구들과 다를바 없는 죄인입니다.
대학교들어가기 2달전에 갑자기 정신분열증이 나타났고 이상한 얘기만 할뿐 다른 행동장애가 없어 그렇게 무심히5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내고 뒤늦게서야 정신병동에 입원하게되었습니다. 20년이란 시간이흘렀지만 아직도 제 아픈손가락입니다. 학생회장도 할정도로 공부도 잘했는데 내가 입히고 먹이고 했는데 더 못한 아이들도 있는데 남동생이 저러냐며 바보가 됐다고 아버지는 인정을 못하시고 수면제를 10년 넘게 복용하시다가 지금은 치매로 요양원에 계십니다.
결혼의 기쁨도 잠시 연극영화과를 나오신 시고모님들, 형님, 유별난 시증조할머님, 개념 없는 시조카들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것 또한 저에게 또다른 삶의 짐이였습니다.
그러다 결혼 7년만에 위암선고 받고 내 신앙생활, 내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지만 내 안에 말씀이 없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가질 못하니 늘 기복신앙에 머물러있고 하나님계시냐며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다람쥐 쳇바퀴에 갇혀 흘러 떠내려가다 죽을 인생이였는데 하나님의 크신 팔안에 사로잡혀 우리들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두 눈을 가져도 남만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았지 정작 고집세고 죄악 가득한 내 모습 보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내 안에 죄만보며 남은 삶 주님께서 고치고 비비고 문질러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으로 자라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서지영

저는 4녀중 장녀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습니다. 어릴적 그닥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이웃집에서 해준 호박죽을 먹거나 집주인 대청마루에서 부채접고 놀던 추억등 나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고등때 입시준비로 마음이 힘들었고 그때 아버지의 바람으로 이혼까지 지난한 시간들이 흘렀는데 참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대학을 가서도 우울했지만 말씀공부하는 모임에 들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지금 생각해도 가장 큰 은혜요 축복이고 이를 통해 저는 완전 회복되었고 자유해졌습니다. 이때 남편을 만났고 오래 사귀다보니 혼전임신과 낙태의 죄를 지어 결국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낙태의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결혼의 기대가 사라질쯤 생겨난 큰딸은 큰 기쁨이었고 선물로 결혼을 새롭게 바라볼수 있게 해준 변환점이 되었습니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며 2년터울의 둘째딸까지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만 생후 100일부터 온몸에 생겨난 아토피의 가려움은 아기와 저를 잠도 못자게 하였고 큰애는 방치되고 남편도 가정의 쉼이 없는 삶을 사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누가 집채만한 금을 주어도 싫고 아침마다 피와 각질과 체액이 묻은 이불을 보지 않게 아기 피부가 정상이 되는 것만 소망하였습니다. 그래도 여차저차 별의별 치료를 하다보니 유치원을 졸업할 때쯤엔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후 남편 회사에서 미국 연수를 보내주어 짧지만 행복한 미국생활도 해보았고 돌아와서는 교회도 다니며 무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뒤늦게 얻은 막내딸도 어느새 초등6학년이 되어 저랑 저녁에 큐티를 합니다.
단지 남편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며 온가족이 주안에서 살아가기를 간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