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차 부모학교>
A
봉천동 달동네에 살았다. 이단에 빠져 결혼은 했지만 이단 교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라 아이 없이 이단 공동생활을 했다. 부부 관계가 않 좋았다. 23년 7월 우리들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유치부를 섬기며 지금은 평안하다.
B
어릴적 사고로 친정 아버지가 먼저 천국에 가시고 엄마 혼자 자녀 넷을 키우셨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며 지역교회에서 만난 청년과 결혼을 해 아이 셋을 낳았다. 첫째를 낳고 망하신 친정엄마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둘째를 낳을 당시 친정 오빠가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했는데 새언니가 간병으로 23개월된 첫째, 100일된 오빠 아들까지 세 아이를 돌보는게 육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오빠는 1년 투병하다 먼저 천국에 갔고, 현재 새언니는 신앙생활하며 조카를 키우고 있다. 온 가족이 슬픔에 잠길 사건이었지만 셋째를 주셔서 상한 마음을 회복시켜주셨다.
셋째를 낳고 시부모님께서는 며느리의 도리를 잘 못한다고 술을 드시면 제게 주사를 부리셨는데 한 번 크게 실수를 하셨다. 공동체의 위로와 사랑, 말씀의 권면으로 1년만에 먼저 사과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시아버지 칠순잔치로 최고의 복수인 용서를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금은 성향 맞지 않는 엄마와 사는 것과 사춘기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좀 더 편안한 엄마이자 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지혜를 구하고자 부모교육을 신청하였다.
C
선천적으로 빼가 안 좋다. 인공고관절 수술도 했고, 허리수술도 2번이나 해 장애 등급까지 받은 상태다. 3남 2녀로 태어났는데 집이 가난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불신결혼을 했고 딸 셋을 낳아 양육하며 남편 욕을 많이 했다. 딸이 결혼 해 가정의 위기가 오자 지인 통해 우리들 교회를 먼저 왔고 딸의 전도로 23년 8월 저도 교회에 등록했다. 남편이 10년동안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했는데 오랜 시간 나가 있으니 독박육아로 우울했다.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자 남편을 무시하게 된다. 현재 남편은 교회 나오지 않는다. 실버 나이가 아니였는데 처음부터 실버 목장에 편성되어 묶여가다보니 지금은 실버목장의 부목자로 섬기고 있다.
D
제가 10살 전까지는 아버지의 바람 사건으로 또 시골에 살면서도 농사지을 땅이 없는 뚜렷한 직업이 없었는데 경부고속도로가 우리마을을 관통 하면서 토목업이라는 직분으로 일하기 시작. 엄마의 넉두리를 듣고 자란 나는 바람피지 않고 술 먹지 않는 오로지 가정을 중요시 하는 친구 아버지를 표본으로 삼았다.
여자를 존중하고 큰소리 치지 않고 이 모습은 초등 3학년때 나에게 전도한 친구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비록 남의 집 머슴으로 일할지라도 주일에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친구엄마와 교회를 나가는 우리시골 마을에 처음으로 교회가 들어오게 한 최초의 가정으로 친구는 전도를 많이 했다. 그 영향으로 교회를 들락날락했지만 하나님은 저를 양육해 가셨다.
기독교 재단의 학교가 시내에 있는 중학교는 여자중학교로 단독으로 있었고 시내에서 벗어난 외곽지에 남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여자 중학교와 남자중학교를 바꾸는 작업이 중3때 이루어졌다.
진학하기 힘든 상황에 장학금에 현혹되어 이 고등학교로 바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1차에 떨어진 학생들을 받아 주는 삼류고등학교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서러움을 명문대학교에 가서 최종학교에 대한 세탁으로 갈망. 실력이 안되어 이류 사립대학을 갔지만 기독교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거기서 만난 선생님과 교수님들을 통해서 교회를 잘 나가지 않는 그때도 이다음에 나는 꼭 교회를 나갈것을 다짐했고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집에 도저히 있을수 없을때 나를 필요로 하는 시골 초등학교 영양사로 봉사활동처럼 친구따라 간 그곳에서 믿음의 실력이 되지 않아도 시내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돌보게 해 주셨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때 중고 토요 예배때 배워서 부른 실로암은 절대로 새벽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밤이었는데 지금 하나님은 그 보상을 다해 주셨다.
4남매 중 맏딸로 돈버는 사람은 오로지 나한사람 시집 가려니 돈줄이 끊어질까 줄줄이 공부하는 동생들 뒷바라지로 돈이 새나가는 것을 은근히 억압하는 시댁 아무것도 해오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중에 집 살때 보태라는 간접 억압. 가장 어려운 시기에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부모가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퇴짜 믿음의 남편 대신 우리집 보다는 낫겠지 하는 외사촌 오빠의 친구를 남편으로 받아 들였지만 내가 자신만만하게 전도하리라 했는데 아직까지도 전도가 안되고 아들 조차도 함께 동맹해서 혼자만 잘 믿으라고 나를 교회 데려 갈 생각마라고..
그런데 요즘 아들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우리들 교회에서 들은 말씀으로 신결혼은 시키고 싶은데 소통이 안되니 지금이 세상적으로 가장 잘 지내고 있는 상황인데 깊은 고난이 와야 주님을 만난다니 두렵기도 합니다. 이 교육을 통해서 아들의 신결혼과 남편을 우리들교회로 오게 하고파서 교육을 받습니다.
E
저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할머니와 엄마의 고부갈등을 보면서 자랐고 그 사이에서 아버지의 방관적인 태도를 보며 자랐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대학에 합격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거절로 진학을 못하였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 겸손인줄 알았지만 알콜의존증이 있고 결혼에 한번 실패한 사실을 모르고 결혼을 하였다. 내 힘으로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했지만 2009년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과 이혼은 할 수 없다고 6개월정도 매일 다투는 갈등이 이었다.
2남 1녀를 낳아 기르고 헌신했지만 헌신짝이 되어 건축자가 버린 모퉁이 돌이 된 듯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 후 우리들교회에 등록은 했지만 교대근무라 예배 중수가 어려웠다. 작년 6월에 정년퇴직을 하고 매일 예배드릴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
버린 모퉁이돌이 머릿돌이 된 인생으로 주님이 만나 주신 것이 날마다 감사하고 새롭다.